野 '삭감 전략'에 허 찔린 與... 사상 초유 '준예산' 가나

입력
2022.11.17 04:30
수정
2022.11.17 08:5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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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꼬집은 소금이나 설탕 따위의 양념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집어올린 양을 의미합니다. 아주 적은 양이지만 때로는 꼬집 하나에 음식 맛이 달라지듯, 이슈의 본질을 꿰뚫는 팩트 한 꼬집에 확 달라진 정치 분석을 보여드립니다.

김진표(가운데) 국회의장과 국민의힘 주호영(왼쪽)·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회동을 위해 만나 악수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김진표(가운데) 국회의장과 국민의힘 주호영(왼쪽)·더불어민주당 박홍근 원내대표가 14일 오전 국회에서 회동을 위해 만나 악수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내년도 예산안을 심의하고 있는 여야 간 희비가 엇갈리고 있다. 예산 심사 시한(11월 30일)을 2주가량 앞둔 상황에서 더불어민주당이 대통령실 관련 비용을 포함한 '윤석열표 예산'을 대거 들어내면서다. 통상 여당에 유리한 것으로 인식되는 예산안 심사마저 과반인 의석수(169석)를 앞세운 야당에 주도권을 빼앗기는 듯한 모습이다.

野, 용산공원 조성사업 예산 304억 전액 삭감

민주당은 16일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예산결산기금심사소위원회에서 대통령실 앞 용산공원 조성사업 예산 303억7,800만 원에 대한 전액 삭감을 단독 의결했다. 앞서 문화체육관광위가 청와대 개방·활용 예산인 59억5,000만 원을 감액했고, 외교통일위원회 예산소위가 외교부 장관 연회 장소 마련 예산 21억7,000만 원을 감액하는 등 '대통령실 이전' 관련 예산 손보기의 연장선 차원이다.

윤석열 정부의 중점 정책 예산도 같은 처지다. 국토위 예산소위는 이날 분양주택 융자 예산만 1조1,393억 원을 감액했다. 국토교통부는 애초 "임대 중심에서 분양 중심으로 부동산 정책을 전환하겠다"며 관련 예산을 1조 원 넘게 늘렸지만, 민주당은 "서민을 위한 공공임대 예산은 깎고 분양주택 융자를 늘리는 건 문제가 있다"고 판단했다. 행정안전부 경찰국 신설 예산도 6억300만 원 전액 삭감됐다.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대표정책인 지역사랑상품권 예산이 행안위 예산소위에서 민주당 주도로 7,050억 원 증액된 것과 대조적이다.

與 "국회선진화법 믿었는데"... 野 '삭감 전략'에 당해

예산 심의가 시작될 때만 해도 국민의힘에선 이러한 상황을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국회선진화법 시행으로 매년 11월 30일까지 예산 심사가 이뤄지지 않으면 12월 1일에 정부안이 자동 상정되는 만큼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야당이 예산 심의에 협조할 것이라고 봤기 때문이다. 예산을 정부안보다 늘리려면 정부 동의가 필수적이라는 점에서도 여당이 예산 심의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중앙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 열린 서민금융위기 대책 마련 현장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6일 오후 서울 중구 중앙서민금융통합지원센터에서 열린 서민금융위기 대책 마련 현장간담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민주당이 의석수를 내세워 대대적인 삭감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급변했다. 민주당은 지난 4일 '2023년 민주당 예산안 심사방향' 발표를 통해 △대통령실 이전이 없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사업 △경찰국 등 시행령 통치로 인한 예산 등을 적극 감액하겠다고 밝혔다. 사업별 구체적인 감액 액수도 명시했다. 각 상임위의 예산 삭감은 당 차원의 움직임을 통해 조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삭감된 예산을 예산결산특위에서 되살릴 수는 있다. 그러나 상임위부터 전방위적 삭감에 나선 민주당과 예결위에서 절충하려면 삭감된 사업 예산 중에서도 일부 선별이 불가피하다. 예결위에서도 민주당이 다수당이기 때문이다. 상임위에서 삭감한 예산을 예결위에서 증액할 때에도 상임위 동의 절차가 필요하다. 국민의힘 원내 관계자는 "예결위에서 여야가 통으로 '주고받기'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며 "야당은 예결위에서 협상 카드를 늘리기 위해 각 상임위에서 예산을 대거 삭감한 것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사상 초유 '준예산' 현실화할 수도

예결위에서 여야 간 타협이 불발될 경우 초유의 준예산이 현실화할 가능성도 있다. 예산을 둘러싼 입장 차뿐만 아니라 이 대표를 향한 검찰 수사와 이태원 참사 국정조사 수용 여부를 두고 여야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서다. 준예산은 새로운 회계연도 개시까지 예산안이 의결되지 못했을 때 전년도에 따라 예산을 집행하는 제도다. 헌법에 규정돼 있지만 한 번도 시행된 사례가 없다.

여권 일각에선 지도부의 초기 대응이 느슨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한 국민의힘 관계자는 "의석수가 이 정도로 차이가 나면 이처럼 나올 것을 예상했어야 한다"며 "예산 심의에 더 전략적인 접근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한편 국회 기획재정위원회는 이날 예산 및 세입 개편안 심사를 위한 소위원회 구성에 합의했다. 조세소위와 청원심사소위는 국민의힘이, 경제재정소위와 예결소위는 민주당이 맡는다. 이번에 신설된 청원소위는 외부에서 청원이 올라온 안건에 대한 심사 역할을 한다.

손영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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