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책 읽는 일본인

입력
2022.12.17 04:40
13면

‘문고본’을 통해 보는 일본의 독서 문화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토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인터넷 확산으로 한일 양국에서 책 읽는 인구가 줄고 있다. 책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일러스트 김일영

인터넷 확산으로 한일 양국에서 책 읽는 인구가 줄고 있다. 책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일러스트 김일영

◇ 지하철에서 책 읽었던 일본인

2000년대 중반만 해도 일본의 지하철을 타면 책을 읽는 사람을 많이 보았다. 비슷한 시기에 한국의 지하철에서는 책보다는 신문이었다. 북적이는 전동차에서 양손을 쫙 펼치고 신문을 읽는 ‘민폐 승객’이 구설에 오르기도 하고, 뒤이어 탄 승객을 위해 다 읽은 신문을 선반에 놓고 내리는 훈훈한 풍습도 있었다. 그에 비해 당시 일본에서는 자그마한 ‘문고본(文庫本)’을 얌전하게 무릎에 올려놓고 읽는 사람이 제법 많아서 인상적이었다.

교보문고나 영풍문고 등 오래된 대형 서점의 이름에 ‘문고’라는 말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문고본이라는 단어가 낯설게 느껴질 것 같다. 동일한 판형과 표지, 비슷한 볼륨으로 다른 내용의 책을 계속적으로 간행하는 총서류 중에서 B6판(가로 10cm, 세로 15cm)의 작은 판형으로 만든 시리즈 책을 말한다. 같은 디자인과 판형으로 간행하면, 한 권 한 권에 특화된 작업이 줄어들기 때문에 제작 단가가 저렴하다. 그만큼 책값이 싸지므로 독자로서는 장점이 크다. 여성용 핸드백에 쏙 들어갈 정도로 사이즈가 작은 만큼 일상적으로 휴대할 수도 있다. 부담 없이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꺼내어 읽기에 딱 좋은 것이다. 일본에서는 스마트폰이 등장하기 전인 2000년대 중반에도 무선 인터넷에 접속가능한 고기능 휴대폰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무선 인터넷 초창기에는 지하에서 인터넷 신호가 끊기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지하철에서는 휴대폰보다 책을 읽는 승객이 많았던 것이다.

◇ ‘문고본(文庫本)’, 일본 독서 문화의 기원

지금은 일본의 지하철에도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문고본은 여전히 독서 문화의 중요한 축이다. 지금도 다양한 문고본이 세상에 나오고 활발하게 소비되고 있다. 전통적인 문고본보다는 약간 사이즈가 큰 ‘신서(新書)’ 시리즈가 특히 잘 나간다. 고전이나 소설, 시집 등이 주로 간행되는 문고본에 비해서, 신서는 일반 교양서나 실용서, 전문적인 분야의 입문서 등 장르가 다양하다. 문고본이나 신서가 베스트셀러가 되는 경우가 적지 않고, 그러다 보니 좋은 글을 쓰는 작가나 학자들도 적극적으로 이 작은 책 시장에 뛰어든다. 문고본이 비싸졌다는 불평도 있다. 1990년대에는 500엔대였던 문고본이 야금야금 가격이 올라서 2021년에는 평균 가격 700엔대가 되었고, 종종 1,000엔이 넘는 ‘비싼’ 신서도 간행된다. 그래도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책 한 권 값이 1만 원도 안 되니 독자에게 큰 부담은 아닐 것 같다.

역사적으로 문고본의 시작은 19세기 독일 라이프치히에 본사를 두었던 레클람 출판사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럽에서 고전으로 받아들여지는 문학, 철학, 자연과학 등 폭넓은 장르의 고급 지식을 동일한 소형 판형과 노란색 표지가 특징이었던 ‘레클람 세계 총서 (Reclam Universal-Bibliothek)’ 시리즈가 큰 성공을 거두었다. 판형과 디자인을 표준화함으로써 저렴하게 책을 보급하자는 의도가, 일반 대중의 계몽을 중요시했던 시대적 수요와 잘 맞아들었다. 또, 서점에 전용 서가를 배치하고 서적 자동판매기를 운영하는 등 판매 전략도 혁신적이었다. 레클람 출판사의 대담한 시도는 전 세계 출판 시장에 큰 자극을 주었는데, 1927년 일본의 이와나미(岩波) 출판사가 레클람 세계 총서를 본떠 ‘이와나미 문고(岩波文庫)’라는 이름으로 시리즈 출간을 시작했다. 뒤이어 1930년대에는 한국에서도 문고라는 간판을 내건 작은 판형의 총서 출간이 간행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는 1970년대에 제법 많은 종류의 문고가 간행되며 활기를 띠었지만, 지금은 그 기세가 많이 꺾였다. 오래된 명저나 고전 등이 총서 시리즈로 간행되어 명맥을 이어가고는 있지만, 문고본이 베스트셀러나 화제의 책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거의 듣지 못하니 말이다.

20세기 초반, 일본에서 문고본은 보통 사람들에게 고급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일종의 ‘뉴 미디어’였다. 특히, 작고 가벼워서 언제 어디에나 휴대할 수 있다는 특징에 힘입어 빠른 속도로 독서 문화를 확산시켰다. 이와나미 문고는 영문을 모른 채 러일전쟁에 동원된 젊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보내는 위문품으로 최고 인기였다고 한다. (이와 비슷하게 독일의 레클람 세계 총서도 세계대전 중 독일군 요새나 야전 병원에서 빗발치듯 팔려 나갔고 한다.) 문고본이 독서를 생활화하는 계기가 된 것은 고무적이지만, 호전적인 시대 상황이 그 배경이었다는 사실은 서글프다. 어찌 되었든 문고본의 등장이 일본의 독서 문화의 기원이라고 해도 좋지 않겠는가?

◇인터넷 시대, 책이라는 ‘제도’의 본질적인 역할을 고민해야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의 출판계도 오래전부터 불황에 시달렸다. 여전히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문고본이 있다고 해도, 예전보다 책이 안 팔리는 것이다. 만화, 잡지, 사진집 등 젊은 층에게 인기가 있던 출판물도 매출이 부쩍 줄었다고 한다. 2020년에 발표된 일본 문화청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전에 비해 독서량이 줄었다고 대답한 사람의 비율이 67.3%이다. 다양한 정보 수요에 부응하는 웹사이트나 동영상 공유 플랫폼 등이 경쟁 매체로 떠오르면서, 시간을 들여 읽고 음미하는 종이책의 수요가 감소한 것은 사실이지 싶다. 출판사에 다니는 일본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혐한’이나 ‘혐중’ 등 자극적인 소재의 출간이 늘고 있는 근저에도, 서적 판매가 부진하다는 문제가 고질적으로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책을 읽어야 똑똑해진다”는 말이 상식으로 통했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책이나 출판물이 아니어도, 인터넷에서 언제든지 원하는 정보를 구할 수 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정보의 시의성이 중요한 만큼, 즉석에서 정보를 검색하고 바로 입수할 수 있는 디지털 플랫폼의 활용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출판계는 책이 팔리지 않아 고민이겠지만 “똑똑해지기 위해” 책을 읽겠다는 사람들의 절실함은 옅을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한 세기 전에는 양질이면서도 저렴한 문고본이 고급 지식의 대중화에 크게 공헌했다. 하지만 엄청난 양의 정보와 고급 지식이 상시 업데이트되는 인터넷 시대에도 책이 첨단 정보 매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는 어렵지 싶다. 그렇다면 책이라는 매체는 이미 시대적 소명을 다한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책을 낸 경험이 있고, 지금도 꾸준히 한일 출판계와 소통하고 있는 저자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문고본 출간이 활성화된 일본이 전문 지식을 대중적으로 소통시키는 무대가 더 넓다고 생각한다. 전문 지식을 읽기 쉬운 문장과 쉬운 용어로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학자도 많고, 상당히 전문적인 내용이 대중적인 출판 기획으로 결실을 맺기도 한다. 그렇게 나온 검소한 디자인의 문고본이 독자들에게 호응을 얻곤 한다. 개인적으로는 책값의 몇 퍼센트로 계산되는 인세보다도, 저자와 독자의 책임감 있는 만남을 매개하는 출판 환경이 훨씬 더 값지다. 한국도 일본처럼 문고본 시장을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의 출판계에서 문고본이 일찌감치 쇠퇴한 나름의 경위와 맥락이 있는 만큼, 단순히 비교할 성질이 못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만, 책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상품이 아니라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지식을 책임 있게 유통시키는 ‘제도’이다. 저자와 독자의 만남을 매개하는 사회적 인터페이스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잘 팔리는 책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책이라는 ‘제도’의 본질적 역할에 대한 고민이 그 어느 때보다도 필요한 시점이다.

김경화 미디어 인류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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