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는 곳에 비술(祕術)을 전하는 나무가 있습니다

입력
2023.01.16 04:00
20면

수묵화 같은 멋 자아내는 비술나무
몽골 고비 사막에서도 저절로 자라
사랑이 움트는 장소이기도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강원 정선군 임계면 미락숲. 비술나무로 이뤄진 아름다운 마을숲이다. 새잎이 나오는 4월 중순의 모습이다. 허태임 작가 제공

강원 정선군 임계면 미락숲. 비술나무로 이뤄진 아름다운 마을숲이다. 새잎이 나오는 4월 중순의 모습이다. 허태임 작가 제공

비술나무는 참 아름답다. 전체적인 외형이 팽나무와 능수버들의 수형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만 따서 모아 놓은 것 같다. 특히 겨울에 나목으로 선 비술나무를 보고 있으면 조선시대 걸출한 화공의 수묵화를 감상하는 느낌이다. 먹빛의 나무줄기가 곧게 뻗다가 저 높은 곳에 이르러 분수처럼 가지를 펼쳐 옅은 잿빛의 잔가지를 아래로 드리우는데, 영락없이 한 폭의 멋진 그림이다.

비술나무는 북방 나무다. 느릅나무과 느릅나무속으로, 한반도 중부 이북에서부터 중국 동북부 지방과 몽골과 극동 러시아에 산다. 영어로는 시베리아느릅나무(Siberian elm)다. 한반도에는 느릅나무속을 대표하는 삼총사가 있다. 중부 이북에 ‘비술나무’가, 중부 이남에 ‘참느릅나무’가 기질에 맞게 각각 치우쳐 살고, ‘느릅나무’는 남북을 가리지 않고 어디서나 자란다. 그 때문에 우리에게는 ‘느릅나무’가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중국에서는 비술나무를 ‘느릅나무 유’자를 써서 유수(榆树)라고 부른다. 느릅나무와 참느릅나무는 각각 춘유(春榆)와 양유(榔榆)다. 비술나무보다 상대적으로 따뜻한 지역에 산다는 의미를 살려 봄과 볕을 접두어로 단 것이다. 하얼빈에서 남서쪽으로 120㎞ 떨어진 유수시(榆树市, 위수)는 비술나무 고목이 많은 고장이다. 1950년대 말 중국에 불어닥친 대기근에 비술나무 씨앗이 그 지역 사람들을 참 많이 살렸다. 비술나무 씨앗은 바람에 잘 날아갈 수 있도록 가장자리에 날개가 달려 있다. 그 모습이 꼭 둥근 동전 모양이라서 비술나무 씨앗을 ‘유수전(楡樹錢)’이라고 한다. 그 구황식물은 지금도 여전히 사랑받는 가정식 재료다. 찐 비술나무 씨앗을 식혀서 냉장고에 하루 뒀다가 꺼낸 다음 숭숭 썬 대파와 곱게 다진 마늘과 함께 기름을 두른 팬에 볶는다. 약간의 소금 간만 하면 비술나무 씨앗 볶음 요리 ‘유수전’이 완성된다. 유수시에서 생산하는 200년 전통의 유명한 고량주 이름도 유수전이다.

비술나무 꽃과 열매. 꽃잎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수술 여러 개가 암술을 둘러싼 모습이 닭 볏을 닮았다(왼쪽). 씨앗이 바람에 잘 날아갈 수 있도록 가장자리에 날개가 달린 모습이 둥근 동전을 닮았다(오른쪽). 이를 두고 중국에서는 ‘유수전(楡樹錢)’이라고 한다. G D Bebeau

비술나무 꽃과 열매. 꽃잎 같은 건 보이지 않고 수술 여러 개가 암술을 둘러싼 모습이 닭 볏을 닮았다(왼쪽). 씨앗이 바람에 잘 날아갈 수 있도록 가장자리에 날개가 달린 모습이 둥근 동전을 닮았다(오른쪽). 이를 두고 중국에서는 ‘유수전(楡樹錢)’이라고 한다. G D Bebeau

국내에서는 강원도에 비술나무가 많이 살기 때문에 민가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정선 임계 미락숲과 영월 섶다리 마을은 비술나무 고목이 만든 숲으로 유명하다. 평창읍사무소는 3년 전 겨울 강풍에 비술나무 고목이 넘어가기 전까지 나무가 그곳의 상징과도 같았다. 서울에도 오래 산 비술나무가 제법 있다. 종로의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정원과 용산경찰서 원효지구대에 비술나무 여러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돼 있고 경복궁과 청와대에도 20m가 넘는 비술나무 고목이 있다. 아주 오래전에 북방의 비술나무를 가져와 심어서 만든 경북 영양의 비술나무숲은 2007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경북 청송 송생리 비술나무 보호수는 약 350년 전 평해 황씨들이 이북에서 내려와 집성촌을 만들던 당시에 심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비술나무는 20세기 초에 서양으로 건너갔다. 영국의 식물 채집가들이 1902년 중국에서 처음 데려가 영국 에든버러 왕립 식물원과 독일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 수목원에 심어 키우면서 유럽의 더 많은 나라에 비술나무가 번졌다. 서양의 느릅나무가 갖은 병에 시달리던 무렵에 접한 비술나무가 여러 종류의 병을 더 잘 견뎌낸다는 것을 확인했다. 비술나무와 유럽의 느릅나무를 교배시켜 병에 맞서는 튼튼한 교잡종을 만들었다. 1930년대부터 이탈리아, 스페인 등지에서 가로수로나 포도 재배 덩굴 지지목으로 비술나무 교잡종을 사용했고 많이 키워 미국에 팔기도 했다.

비술나무는 척박한 환경을 견디는 힘이 남다르다. 사막에서도 숲을 이룰 정도다. 아서릴라환경연구소(Arthur Rylah Institute)

비술나무는 척박한 환경을 견디는 힘이 남다르다. 사막에서도 숲을 이룰 정도다. 아서릴라환경연구소(Arthur Rylah Institute)

비술나무의 가장 큰 매력은 척박한 환경을 견디는 힘이다. 몽골 고비 사막에서 저절로 살 수 있으니 말이다. 한국 정부가 몽골 사막에 비술나무를 심기 시작한 지 어언 20년이 되었다. 그간에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인근 지역과 고비 사막 등지에 축구장 3,000개 크기의 숲이 생겼다. 그 숲을 방풍림으로 이제는 보리와 귀리와 호밀과 같은 작물을 재배하고 목축도 할 수 있는 ‘혼농임업’을 우리나라가 나서서 연구하고 있다. 나무 심기의 중요성을 실감한 몽골 정부는 2010년부터 매년 5월과 10월 둘째 주 토요일을 식목일로 정했다. 이쯤 되니 자연이 숲을 만들기 위해 비밀스레 전해온 술법이 ‘비술(祕術)나무’가 아닌가 싶다.

실은 볏술나무 또는 벼슬나무라고 부르던 것이 비술나무가 된 거다. 춘분 무렵 잎도 나오기 전에 와다닥 피는 꽃이 닭 볏을 닮았기 때문이다. 경북 봉화의 춘양초등학교 교정에는 적어도 백오십 살은 넘어 보이는 비술나무 고목이 ‘벼슬나무’라는 이름을 달고 서 있다.

경북 봉화군 춘양면 춘양초등학교 교정의 비술나무 고목. 허태임 작가 제공

경북 봉화군 춘양면 춘양초등학교 교정의 비술나무 고목. 허태임 작가 제공

중국 '시경(詩經)'에 비술나무는 사랑이 움트는 장소로 등장한다. 2023년 1월 중순, 춘양초등학교의 비술나무는 어떤 희망을 품은 듯이 꽃눈을 방실방실 부풀리고 있다. 꽃눈 터질 무렵에는 나무 아래에서 누군가 간절히 바라던 만남이 꼭 성사되었으면 좋겠다. 춘양은 작고 소담하지만 ‘춘양목’ 소나무로 꽤 유명한 마을, 이 아담한 마을을 지나가거든 꼭 비술나무 앞에 와서 사랑을 고백해보라고, 비술나무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

허태임의 초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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