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마지막 순간, 떠오를 사람

입력
2023.03.02 11:00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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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아 '어라 저기 송이가' (문학사상 2023년 2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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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생사를 오가는 순간을 겪어본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나만의 마지막 영화에 담길 장면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첫 장면만큼은 소중한 이의 사랑을 받은 어떤 순간이지 않을까. 아마도 고독한 인생을 버티게 하는 마지막 힘이 거기에 있어서일 테다.

월간 '문학사상' 2023년 2월호에 실린 정지아의 '어라 저기 송이가'는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산에서 조난당한 한 남자의 회상기다. 죽음의 문턱 앞에 놓인 인물을 통해 작가는 삶의 버팀목을 향한 그리움, 사그라들기 힘들어 더 외로운 생의 열망 등을 가만히 응시한다. 해학적 문체로 어두울 수 있는 극한 상황 속 인물에게 마음을 탁 풀어놓고 감정이입하게 된다.

주인공 '나'는 조난당했다. 송이를 따려다 발을 헛디뎌 바위 사이에 왼쪽 다리가 빠져 버렸다. 넘어질 때 휴대전화가 손에서 빠져나가 구조요청도 못하고 다리를 빼지도 못한 채 꼼짝없이 하루를 보냈다. 고라니 한 마리, 다람쥐 한 마리 지나가는 동안 인간의 발자국 소리는 듣지도 못했다. 물도 없고 불도 없다. 사무치게 외로운 순간 아버지가 떠올랐다.

조난 장소는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산이다. 아버지는 구천구백 평의 산에서 송이와 약초 등을 캤다. "송이로 그는 먹고 입고 배우고 자랐다." 홀로 다니는 아버지에게 '외로움이 뭔지 모르던 시절'의 나는 심심하지 않느냐 외롭지 않느냐 물었었다. "내 손을 지둘리는 것들이 천지삐까린디." "여그 요놈들이 싹 다 동문디?" 이런 답 너머 아버지의 삶을 헤아리게 된 건, 바위에 다리가 끼인 지금에 와서다.

정지아 소설가. 김유정기념사업회 제공

정지아 소설가. 김유정기념사업회 제공

이는 나이테가 늘어난 덕분이기도 하다. 쉰이 넘은 주인공은 2년 전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동기들보다 늦은 전무 승진을 코앞에 둔 시점이었다. 항암 치료를 8차까지 견뎠지만,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고 그길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 별세한 지 10여 년 만, 아버지까지 숨을 거둔 지 13년 만이다. 풍파를 겪고 나서야 아버지의 고독을 짐작해 본다.

소설에서 송이는 복합적 상징물이다. 아버지와 '나'의 매개체이자 밥벌이고 자식이고 또 아버지가 말해 준 생의 이치기도 하다. 자식에게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는 송이 명당을 아버지가 오래전에 일러주었지만 "명문대 다니던 자신이 아버지처럼 산을 밑천 삼아 살 리 만무하다 확신"했던 그는 건성으로 들었다. 결국 매일같이 산을 올라도 송이를 못 찾다가 겨우 한 송이 발견하는 순간 '나'는 이 꼴이 됐다. 송이도 생의 이치도 마지막 순간까지 다다르기 어려운 것인지 모른다.

'나' 스스로는 귀향도 산행도 아버지와 무관하다고 '의식적 판단'을 내렸지만 다분히 아버지를 향해 있다. 귀향해서 "혼자 죽어가고 싶었다"고 말했지만 조난당하자 헬리콥터의 구조를 바란다. 주인공은 고향집에서 자신의 삶을 오롯이 축복해 주던 이들의 기억을 딛고 다시 살고 싶었던 듯하다. 그를 보며, 누구나 그런 장면 하나 정도는 안고 살아갈 수 있길, 누군가의 그 장면에 내가 들어갈 수 있길 하는 바람이 싹튼다.

진달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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