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척하기의 유용함

입력
2023.03.04 00:00
22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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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게 하는 불안의 이유야 하루 종일 나열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것은 가면 증후군이다. 가면 증후군은 자신의 성공이 노력이 아니라 순전히 운으로 연결되었다고 믿는 심리라고 한다. 순전한 운 덕분에 자기 자리에 올라올 수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노력으로 성취를 이뤘다고 과대평가하는 게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괄목할 만한 성공을 이룬 것은 아니다. 내가 이룬 성취는 다만 글과 이야기를 팔아서 독립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 작가로 지내고 있다는 것 정도일까. 크지 않은 성취임에도 나는 이게 뻥 터져 사라질까 봐 불안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말을 보게 되었다. 'Fake it until you make it', 그러니까 성취를 이루고 싶다면, 그런 척을 하다 보면 진짜로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보고 있자니, 1년 넘게 작업하고 있는 시나리오가 생각이 났다.

재작년 겨울에, 나는 내 단편 소설을 드라마화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나는 드디어 내가 큰돈을 한 번 만져보겠구나 해서 아주 기뻤다. 소설의 영상 2차 판권 판매는 출판 소설로 가장 큰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작사의 제안을 확인하고 나는 큰 고뇌에 빠졌다. 제작사에서는 내가 시나리오를 쓰길 바라고 있었다.

당시까지 내가 읽어본 시나리오는 딱 두 개였다. 하나는 중학교 때 교과서에서 읽은 '육체미 소동'. 고등학교 때 모의고사 기출문제집 풀면서 읽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소설이야 살면서 수도 없이 읽었으니 큰 부담 없이 써볼 수 있었지만, 시나리오는 그렇지 않았다. 거기다 드라마는 분량이 상당히 많아서 더 도전적이었다.

나는 순전히 계약금 때문에 사인했고, 직후 과민성 대장염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절박하게 시나리오를 찾아 읽고 연습했다. 매번 회의에 나가서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잘 되어가고 있는 척할 때마다 엄청난 연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 지도 벌써 1년 넘는 시간이 흘렀다. 나는 2023년 3월에는 반드시 내가 망해 있으리라고 믿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 지금 나는 꽤 많은 분량을 작성했다. 지금까지 쌓인 문서들을 읽다 보면 경험 없이 달려들었는데 이렇게 해놓을 수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앞에서 할 수 있다고 허풍을 쳐놓고, 뒤에서 이 허풍을 어떻게든 현실로 만들어 보기 위해 시간을 들였더니,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것을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낙관적인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 수많은 고통이 도사리고 있을 것이고, 어쩌면 내 노력을 수포로 돌리는 치명적인 일격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내가 시도해보지 않은 형식으로도 이야기를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을 얻었다. 가면을 쓰고 있다고 믿었는데 어느새 맨얼굴이 드러나 있었던 거다.

어쩌면 2030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경험을 공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 보면, 내 나이에 이미 엄청나게 할 수 있는 게 많은 사람이 얼마나 있겠나? 물론 겸손도 큰 미덕이지만, 내가 당장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여 망설여지는 기회라도 일단 붙잡아 보는 대담함도 때로는 필요하겠다 싶다.


심너울 SF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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