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C보다 가혹한 미국 반도체 지원법

입력
2023.03.11 11:0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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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방한한 조 바이든(오른쪽에서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경기 평택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웨이퍼에 서명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지난해 5월 방한한 조 바이든(오른쪽에서 두 번째) 미국 대통령이 윤석열 대통령과 경기 평택의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방문해 웨이퍼에 서명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국내 신생기업(스타트업)들 가운데 미국 벤처투자사(VC)에서 투자 받기를 원하는 곳이 많다. 돈 많은 미국 VC들은 투자 단위가 다르기 때문이다. 스타트업 대표들에 따르면 국내 투자보다 맨 뒤에 0이 한두 개 더 붙는다.

하지만 투자 단위만 다른 것이 아니라 조건도 다르다. 미국 VC 가운데 투자를 하면서 본사를 미국으로 옮기는 플립(flip)을 투자 조건으로 요구하는 곳들이 꽤 많다. 플립을 하면 미국에 세운 회사가 본사가 되고 국내에서 창업한 회사는 미국 본사의 자회사가 된다.

미국 VC들이 굳이 투자하는 스타트업들에 플립을 요구하는 이유는 관리가 쉽기 때문이다. 수시로 투자 기업을 들여다보고 상황을 점검하며 필요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서다. 또 VC들이 수익을 올리기 위해 투자 지분을 팔거나 인수합병(M&A)을 고려할 경우 해외 기업보다 미국에 있는 기업이어야 용이하다.

국내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많은 돈을 투자 받고 더 큰 시장인 미국에 진출할 수 있다는 장점 때문에 플립을 고려할 수 있다. 그런데 플립을 하면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 우선 창업자를 포함해 국내 주주들이 뜻하지 않은 주식의 양도소득세를 내야 한다. 국내 주식을 미국 본사 주식으로 바꾸는 주식 교환 행위에 대해 양도소득세가 부과된다. 특히 곧잘 매출이 발생하고 국내에서 투자를 많이 받았다면, 내야 할 세액이 껑충 뛴다. 국내에서 100억 원 이상 투자 받은 모 스타트업 대표는 미국 투자를 제의받고 플립을 할 경우의 양도세를 계산해 보니 투자액의 3분의 1 이상을 세금으로 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정부에서 각종 지원을 받았다면 이것도 대부분 토해내야 한다. 정부 입장에서는 세금으로 지원한 만큼의 혜택을 받은 스타트업이 미국으로 옮기면 당연히 국부 유출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런 부담을 감수하고도 남을 만큼 많은 투자를 받거나 이익이 크다면 플립을 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과연 어떤 실익이 있는지 검토해야 한다. 실제로 또 다른 스타트업 대표는 미국의 유명 VC로부터 플립을 조건으로 투자 제의를 받았으나 투자액보다 양도세와 정부 지원금 등 토해내야 할 비용이 더 많아서 투자를 거절했다. 물론 일부 미국 VC들은 투자 가치가 아주 높은 국내 스타트업이라면 각종 세금까지 대신 내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흔한 경우는 아니다. 그만큼 미국 VC들에서 투자를 받으려면 손익 계산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작은 VC 투자도 이런데 하물며 미국 정부가 나서는 반도체 지원법은 말할 것도 없다. 527억 달러(약 70조 원)가 걸린 반도체 지원법은 국내 반도체 업체들 입장에서 플립 조건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조건을 요구한다. 지원금을 받는 대신 예상을 초과하는 이익이 발생하면 지원금의 최대 75% 범위 안에서 미국 정부에 토해내야 하고, 생산 장비와 원료 등 기업 비밀도 보고해야 한다. 반도체 생산시설에는 생산 라인별 장비의 설치 내용이 아주 중요한 기밀이다. 특정 장비를 몇 도 각도로 틀어서 설치하느냐에 따라 완성품 생산비율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가혹한 조건이어서 국내 반도체 업계는 물론이고 우리 정부도 우려하고 있다. 통상교섭본부장이 10일 미국을 방문해 이런 우려를 전달할 예정이지만 과연 미국이 얼마나 수용할지 의문이다. 미국 VC의 플립을 요구하는 스타트업 투자든 미국 정부의 반도체 지원법이든 공통적으로 일깨우는 것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최연진 IT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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