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단단한 나무, 흔하지만 귀한 나무

입력
2023.03.13 04:30
19면

고개 돌리면 늘 우리 곁에 있는 나무, 회양목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청와대 영빈관 화단에 있는 회양목의 모습. 사진 허태임 작가 제공

청와대 영빈관 화단에 있는 회양목의 모습. 사진 허태임 작가 제공

울타리가 되고 악기가 되고 도장이 되고 약이 되고 꿀이 되는 나무가 있다. 그 재주 많은 나무가 우리 가까이 있다. 심지어 거의 매일 만나는 편이다. 하지만 잘 모른다. 나무 자체가 워낙 작고 꽃이나 열매가 두드러지지 않아서 무심코 지나치기 때문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사계절 내내 푸른 잎을 달고 묵묵히 우리의 정원과 꽃밭을 지키는 나무, 그건 바로 회양목이다.

주변에서 회양목이 없는 교정과 사옥과 아파트 단지를 찾기 힘들 정도로 회양목은 우리의 생활 가까이에 밀착해 있는 나무다. 전 세계적으로 다양한 품종이 개발되었고 국내에 도입된 종류만 해도 스무 종이 넘는다. 사람들은 가지치기를 해서 회양목 울타리를 일정 높이로 유지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릎 높이 정도로 단정하게 정돈된 키가 작은 회양목을 주로 보게 된다. 하지만 그냥 두면 어른 키를 훌쩍 넘길 만큼 크게 자라기도 한다.

석회암 지대 회양목 군락지.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산다.

석회암 지대 회양목 군락지.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산다.

회양목은 정말이지 천천히 큰다. 50년을 꼬박 키워 봤자 둘레가 겨우 한 뼘이 될까 말까다. 서서히 늘린 나이테는 아주 곱고 촘촘하다. 목수들은 회양목 원목이 실크처럼 섬세한 질감이라고 평가한다. 나무 한 그루에서 얻을 수 있는 목재라고 해봐야 워낙 적어서 귀하게 쓰일 수밖에 없다. 지중해 일대에서는 그 지역에 사는 서양 회양목으로 플루트나 리코더 같은 목관악기를 만든다. 조각품이나 장신구의 재료가 되기도 하고 자그마한 말을 만들어 체스를 두기도 한다.

우리 선조들은 목판 활자를 만들 때 회양목을 썼다. 한반도에 자라는 나무 중에 목재가 가장 치밀하고 균일한 게 회양목이다. 현미경으로 나무토막을 들여다보면 보통 다른 활엽수들은 세포 모양이 들쑥날쑥하지만 회양목은 아주 작은 물방울무늬가 거의 비슷한 크기로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다. 한결같이 고른 그 기질 덕에 글자를 새기기에 안성맞춤이다. 그 시절 신분증과도 같았던 호패와 선비들 낙관의 도장을 만들 때도 회양목이 쓰였다. 그래서 회양목은 ‘도장나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약효도 빠뜨릴 수 없다. 민간에서는 회양목 어린 가지와 잎을 달여서 산모가 해산하기 힘들어할 때 먹이기도 했다.

회양목 꽃은 매화나 산수유처럼 이른 봄에 핀다.

회양목 꽃은 매화나 산수유처럼 이른 봄에 핀다.

회양목 꽃은 지금, 3월에 핀다. 산수유나 매화처럼 이른 봄에 피는 나무다. 그런데 꽃이 워낙 자잘하게 피고 색이 옅어서 사람들 눈에 들기는 쉽지 않다. 그 대신에 회양목은 향기로 다른 생명체를 호린다. 이맘때 나는 바쁘게 어딜 가다가도 그 향기가 훅 끼치면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살피게 된다. 시선을 조금 아래에 두고 이리저리 둘러보면 회양목이 금세 시야에 들어온다. 숨을 더 크게 들이켜면 장미와 라벤더를 합친 것 같은 특유의 향기가 나를 더욱 꽃 쪽으로 이끈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킁킁대며 코를 꽃에 파묻게 된다. 달콤한 꿀 향기에 푹 빠지는 순간이다. 만개한 꽃과 잘 익은 꿀이 마구 뒤섞인 듯한 그 향기는 마치 산미를 쏙 뺀 에티오피아 예가체프 계열의 어떤 커피 향 같다. 멀리서부터 수많은 벌이 그 향기를 맡고 회양목을 찾아온다. 최근 부쩍 벌들이 사라져서 근심이 늘어난 양봉 농가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나무가 회양목이다.

회양목의 진짜 매력은 심어 기르는 곳 말고 그들이 스스로 자라는 자생지에서 제대로 터진다. 자연에서 회양목은 석회암이 주를 이루는 다소 척박한 땅에 산다. ‘아우라지’라는 지명으로 더 잘 알려진 강원도 정선군 여량면은 회양목의 고장이다. ‘골지천’과 ‘송천’ 두 개의 물줄기가 어우러지는 지점을 말하는 순우리말이 아우라지다. 그곳은 주변의 고양산, 반론산, 반륜산과 같은 높은 산들로 둘러싸여 있어서 그야말로 첩첩산중 오지다. 모두 석회암 산지로 회양목을 품은 산들. 인적이 드문 그 산들을 헤집고 들어가 보면 회양목 군락지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키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수형이 둥글기도 하고 뾰족하기도 한, 제멋대로 자유롭게 자라는 다양한 회양목을 만날 수 있다. 오래 자라서 내 팔뚝 굵기 정도 되는 나무는 얼마나 근사한지, 와락 껴안고 데리고 와서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석회암 지대 회양목 군락지.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산다.

석회암 지대 회양목 군락지. 저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자유롭게 산다.

그렇게 오래 산 멋진 회양목은 천연기념물이 되기도 한다. 경기도 여주에 있는 효종대왕 능인 영릉(寧陵)의 재실(齋室) 마당에 사는 3백 살이 넘은 회양목이 그렇다. 북한에도 있다. 강원도 천내군 두류산의 회양목 군락지는 북한 천연기념물 제202호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존재만으로도 고상하고 독특한 품위와 품격이 느껴지는 회양목 고목이 경남 밀양의 삼은정(三隱亭)과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에 산다.

한반도 곳곳에서 회양목이 꽃을 피우니, 그 향기가 그득하다. 하지만 꽃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넘실대는 그 향을 맡고 싶다면 어서 다가가서 회양목 곁에 잠시라도 머물러야 한다.


허태임의 초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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