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킨도 안 바르던 미국 상남자들, '메이드 인 코리아' 아이크림에 빠지다

입력
2023.03.1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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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처럼 남녀노소 뷰티에 관심 많은 나라는 생각보다 드물다. 특히 한국은 남성들이 비비크림이나 틴트를 바르는 것이 익숙하고 서클렌즈를 끼는 것도 크게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그러나 '남성용 화장품'이라고 하면 "남자가 화장을?"이라고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는 나라들이 세상엔 여전히 많다.


[곧, 유니콘] 정나래 카돈 대표

'화장하는 남자'를 이상하게 보는 대표적 국가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 남성 20%가 평생 스킨케어 제품을 써본적이 없다는 거예요. 색조도 아니고 기초 제품인데도요." 한국에서 만들고, 미국에서 판매하는 남성용 화장품 브랜드 '카돈'(Cardon)의 공동 창업자, 정나래(41) 대표의 말이다.

정 대표는 미국 남성용 화장품 시장을 자세히 들여다 보곤 "20~40달러 사이의 중저가 제품군이 비어있다"는 결론을 내린 뒤, 2019년 카돈을 창업했다. 이후 만 4년. 척박했던 미국 시장에 씨앗을 뿌리고 이제 싹을 틔우려 하는 카돈의 이야기를 최근 화상으로 만난 정 대표에게 들어봤다.

미국 남성용 화장품 브랜드 '카돈'(Cardon)의 공동 창업자인 정나래 대표. 카돈 제공

미국 남성용 화장품 브랜드 '카돈'(Cardon)의 공동 창업자인 정나래 대표. 카돈 제공


#1. 실리콘밸리

창업, 그 막연했던 꿈에 확신을 준 곳.

정 대표는 2015년 미 와튼스쿨 MBA에 입학하기 전까지 미국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 대학교까지 한국에서 졸업한 그의 외국 거주 경험은 종합 소비재 회사 피앤지(P&G) 근무 당시 싱가포르에서 보냈던 1년 반이 전부다.

이름만 들어도 아는 안정적인 직장 피앤지를 9년 가까이 다닌 그에게, 창업은 마냥 가깝지만은 않은 꿈이었다. "저는 30세 전까진 외국에 살아본 적 없는 평범한 한국인이었어요. 한국은 창업을 장려하는 분위기는 아니잖아요. 주변에서는 잘 안 될 가능성을 생각하면서 불안해하는 경우도 많고요." 어쩌면 하는 것보다 안 해야 할 이유가 더 많았던 창업을, 그것도 미국에서 하게 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MBA 졸업 후 미국 대형마트 체인인 월마트에 입사하면서 정 대표는 실리콘밸리에 둥지를 틀었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창업을 해본 사람이 안 해본 사람보다 많다'는 곳이다보니 그 역시 자연스럽게 동화된 것 같다고 회상한다. "실리콘밸리가 다른 곳과 가장 다른 게 누구나 창업을 생각한다는 점 같아요. 여기서 사람들 만나서 창업 아이디어를 얘기하면 대개 반응이 같아요. '오, 그거 좋은 생각이다. 평생 한 번은 스타트업 해봐야 하지 않겠어?'"

결심만 한다고 될 일은 아니었지만, 다행히 운이 따라줬다. MBA에서 뜻이 맞는 미국인 공동 창업자를 만나 한국인이지만 비교적 어렵지 않게 회사를 꾸릴 수 있었다. 정 대표는 제품 개발과 마케팅 등을, 재클린 오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운영과 회계 등을 맡아 함께 시너지를 내고 있다.

#2. 데이터

여성 창업자가 남성용 화장품을 만들 수 있는 이유.

피앤지에서 여성용 화장품 SK2 등을 담당할 땐 그래도 어느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 자신이 곧 소비자이기 때문에 제품에 대한 이해라든지 소비자 반응을 예상하는 게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번도 남자로 살아본 적 없는 그에게 남성용 화장품은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의존한 건 데이터였다. "월마트에서 일하는 동안 소비자 데이터를 어떻게 모으고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많이 봤어요. 데이터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우니까, '데이터만 있으면 내가 직접 소비자가 아니어도 공략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도 붙었죠. 그래서 처음부터 소비자 인터뷰, 설문조사 같은 걸 많이 해서 데이터를 많이 쌓았어요."

데이터는 실제로 시장을 이해하고, 회사를 키우는 데 큰 힘이 됐다. 스킨도 잘 안 바르는 미국 남성들이 과연 이걸 쓸까 싶었지만, 예상 외로 흥행한 아이케어 제품이 대표적인 사례다. "소비자 설문 데이터를 보니까, 여성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화장품을 쓰지만 남성들은 피부 어딘가에 문제를 느끼면 그걸 해결하기 위해 화장품을 쓰더라고요. 그런데 남성들의 피부 고민 중에 순위가 높은 게 다크서클이었어요. 고민이라니까 한 번 만들어보자 싶었는데, 저희조차 이게 될까 싶었죠. 스킨도 잘 안 바르는 남성들이 굳이 아이케어 제품을 쓸까, 생각한 거예요."

그러나 데이터는 정확했다. 눈 밑 다크서클 쪽에 슥 바르는 제품은 출시 즉시 반응이 왔고, 카돈의 대표 제품 하나로 자리 잡았다.

카돈의 다크서클 아이 레스큐(Dark Circle Eye Rescue)는 정나래 대표가 꼽는 '의외로 잘 된 제품' 중 하나다. 카돈은 다크서클에 대해 고민하는 미국 남성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 제품을 개발했다. 카돈 제공

카돈의 다크서클 아이 레스큐(Dark Circle Eye Rescue)는 정나래 대표가 꼽는 '의외로 잘 된 제품' 중 하나다. 카돈은 다크서클에 대해 고민하는 미국 남성들이 예상보다 많다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이 제품을 개발했다. 카돈 제공


#3. 배움

스타트업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

카돈의 제품은 지금까지 25만 병 이상 팔렸다. 아직 흑자를 내고 있진 않지만 흑자로 가는 길에 있다는 게 정 대표의 설명이다. 카돈 제품 구매자의 3분의 1 정도가 재구매를 한다는 데이터에 기반한 예측이다.

여기까지 회사를 끌고올 수 있었던 건 공동 창업자를 잘 만난 덕도 있지만, 스스로가 배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인 듯하다고 그는 말한다. "제가 창업하기 전에 큰 회사를 10년 넘게 다녔잖아요. 경험이 적지 않으니까, 웬만한 건 다 알고 또 할 줄 안다고 생각했는데 스타트업을 해보니까 회사 설립에 필요한 아주 기초적인 법지식부터 제가 모르는 게 너무 많더라고요. 그동안은 회사에서 다 해줬기 때문에 착각했던 거죠."

그래서 그는 창업을 고민하는, 혹은 스타트업에 근무하고 싶은 이들에게도 '배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인지'를 먼저 고민해보라고 조언한다. 스타트업에선 특히 배움에 대한 열정이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게 4년 간의 경험을 통해 그가 또 하나 배운 사실이다. "스타트업에선 나한테 원래 주어진 역할뿐 아니라 다른 역할도 요구될 때가 많아요. 그럴 때 '왜 자꾸 이런 거까지 시키는 거야'가 아니라 '새로운 일이라 좋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스타트업과 함께 성장할 수 있을 겁니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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