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소, 무기력, 소신정치 실종" 여야 초선의원 13명이 쓴 '반성문'

입력
2023.03.28 04:30
수정
2023.03.28 09:31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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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민주당 초선 13명 심층인터뷰
기성정치에 균열 낼 '소신정치' 사라져
강성팬덤에 편승 & 주류정치에 투항

지난해 7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초선의원 모임이 열리고 있다. 오대근 기자

지난해 7월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국민의힘 초선의원 모임이 열리고 있다. 오대근 기자


"의원들 단톡방은 '아부방'이 된 지 오래예요. 공지사항 나오면 전달하고, '대표님, 비대위원장님 고생하셨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인사치레나 늘어놓는 그런 자리가 됐죠. 정부 정책이나 정치 발전을 위한 건설적인 얘기는 아무도 안 해요."

국민의힘 A 초선의원


"당 지도부가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밀어붙이고, 통보하는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의총장 들어가면 '말해봐야 뭐하나' 이런 냉소가 만연해 있어요. 다른 생각이 있어도 참고, 입을 다물죠. 갈등과 대립이 극심한 사회를 만든 데에는 우리의 '원죄'가 있습니다."

더불어민주당 B 초선의원

21대 국회 초선의원들이 고개를 숙였다. 정치신인으로서 기성정치에 균열을 내고 혁신을 이끄는 '소신정치'의 모습이 사라진 데 대한 부끄러움을 토로하면서다. 21대 국회 초선의원은 전체 의원(299명) 중 과반이 넘는 52.1%(156명)를 차지한다. 한국일보는 이 중 국민의힘과 민주당 소속 초선의원 13명을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들은 2020년 4월 21대 국회 개원 이후 3년이 흐른 현재, 지역과 직역을 대표하고 정치를 쇄신하겠다는 다짐이 꺾인 데 대해 공통적으로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일부 의원은 재선을 포기하겠다는 의사를 드러내기도 했다.

한마디로 양극화 정치의 한 단면이다. 당 주류 입장에 편승하고 강성 당원들의 눈치를 보느라 민심에서 동떨어지고 있는데도 마땅한 출구를 찾지 못한 채 진영정치에 동원되는 전사(戰士)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런 현상은 21대 국회에 들어 유달리 심해졌다는 게 현역의원과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극단적 정쟁을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향으로 초당적인 선거제도 개편 논의가 이뤄지는 배경이기도 하다.

"존재 이유 망각한 초선, '괴물정치' 만들었다"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민주당의 한 초선의원은 요즘 '의욕 상실' 상태라고 했다. 지난달 27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에 대한 체포동의안이 간신히 부결된 뒤, 강성 당원 중심으로 이뤄진 이른바 '수박 색출' 작업에 시달린 결과다. '수박'은 겉과 속이 다른 배신자라는 뜻으로 '비이재명계' 의원을 지칭할 때 쓰는 은어다. 그는 "어디 나가기만 하면 면전에 대놓고 욕하는 행태에 지쳤다"며 "모욕감과 인지도가 비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수박깨기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앞에서 이 대표의 체포동의안 부결 관련 이탈표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지지자들로 구성된 수박깨기운동본부 회원들이 지난 3일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앞에서 이 대표의 체포동의안 부결 관련 이탈표 규탄 집회를 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그를 더 지치게 하는 것은 강성 당원의 과격한 행동보다 이들에게 기댄 일부 초선의원의 행태다. 그는 "당원들은 분노할 수 있고, 그걸 행동으로 표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의 말만 떠받들면서 증오를 극대화하는 일부 초선의원들이 더 문제다"라고 했다.

실제로 민주당 초선의원 하면 상징적으로 떠오르는 것이 '처럼회' 같은 강성 친명 초선의원 모임이다. 앞서 김용민 의원은 2021년 전당대회에서 강성 지지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초선임에도 수석최고위원으로 지도부에 입성했다. '팬덤정치'에 올라타면 초선이라도 발언권이 세진다는 걸 확실히 보여준 사례다. 팬덤정치에 편승하거나 아니면 찍혀서 숨죽이고 있는 게 지금 민주당 초선의원의 현주소다.

국민의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초선의원들이 당 지도부의 홍위병으로 전락했다는 점에서 발현되는 양상이 다를 뿐이다. 특히 지난 전당대회 과정에서 당대표 출마를 저울질하던 나경원 전 의원을 상대로 초선의원 48명이 불출마 촉구 연판장을 돌린 사건이 자주 회자된다. 대통령실을 돕는다는 명분을 앞세워 학교폭력을 연상케 하는 '집단린치'에 초선의원들이 문제의식 없이 뛰어든 것 아니냐는 비판이 많았다. 당시 연판장에 이름을 올린 비영남권 한 국민의힘 의원은 "지금 당 지도부와 대통령실에 비판적인 목소리 냈다가는 살아남지 못한다"고 자조했다.

21대 국회 초선의원 현황. 그래픽=김문중 기자

21대 국회 초선의원 현황. 그래픽=김문중 기자

인터뷰에서 만난 초선들이 느끼는 위기의식이나 무력감은 심각한 수준이었다. 비례대표로 입성한 한 의원은 "갈수록 독하게 얘기하는 사람만 주목받고 살아남는다"며 "지금의 국회는 이런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괴물정치나 다름없다"고 했다. 그는 내년 총선 불출마도 염두에 두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국회가 본래의 사명에서 너무 멀어져 버렸다. 국회 밖 경력을 살려 전문성을 발휘해 보겠다는 당초 다짐을 실현할 길도 막막하다"며 "3년간 내가 어떤 정치를 해 온 것인지 스스로 창피할 정도"라고 했다.

수도권 지역의 한 민주당 의원은 "비공개 발언도 노출돼 공격을 받는 상황에 '팬덤' 눈치를 안 볼 수 없다"고 했다. 호남에 지역구를 둔 민주당 의원도 "내 목소리는 죽이고 전체 당 행보와 맞추려는 게 습관화됐다"며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참고, 말 안 하고 이런 게 관행이 되다 보니 독립된 국회의원 역할에서 엇나간다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역대 국회 초선의원 비율. 그래픽=김문중 기자

역대 국회 초선의원 비율. 그래픽=김문중 기자

초선의원의 소신정치가 실종되자 정당민주주의는 악화일로다. 의원총회에선 건강한 토론 문화를 찾아보기 어렵다. 당내에서 비판과 견제가 없으니 지도부 홍위병 역할이나 팬덤정치의 스피커 역할을 하는 데 대한 반성과 성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번 인터뷰에서 만난 일부 초선의원들도 이런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 보였다. 국민의힘 친윤계 초선의원은 "(강성 친윤의 발언이) 정당민주주의를 가로막는다는 비판을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 총대를 메야 혼란을 줄일 수 있다"며 현실론을 개진했다. 이 대표의 검찰 출석에 동행한 민주당 초선의원은 "강성파라는 분류에 동의할 수 없다. 윤석열 정부에 대항하기 위한 일종의 '선발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나부터 살고 보자" 공천 공포에 사로잡힌 초선들

21대 국회에서 '초선 정치'가 후퇴한 원인으로는 무엇보다 후진적 공천 시스템에 있다는 것이 초선의원들의 공통된 진단이었다. 특히 여당의 경우 당 지도부나 용산 대통령실이 공천을 좌우할 것이라는 인식이 깊게 깔려 있었다. 야당의 경우에는 지지층에 영합하는 정치활동을 하지 않으면 경선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생존 논리가 강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국민의힘 한 초선의원은 "당시 연판장에 서명을 안 하거나, 주저했던 사람들은 다 공천에서 빠지지 않겠느냐"며 "이런 상황에서 '결기를 드러내라', '소신정치를 하라'는 건 나를 믿고 뽑아 준 유권자와 정치생명을 포기하라는 말"이라고 했다. 또 다른 국민의힘 초선의원은 "몇몇 의원들은 '초선 때 못 한 일 재선, 3선 돼서 하자'고 말하기도 한다. 이게 말이 되느냐"며 "누가 더 용산(대통령실)에 충성하나 경쟁이 붙었다. 초선들이 더 권력지향적"이라고 꼬집었다.

수도권에 지역구를 둔 민주당 의원은 "지도부의 나팔수 노릇을 하고 있는 의원들을 보면 지역구가 더 취약하다"며 "공천을 더 의식해 과도하게 행동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했다.


'소신정치'에 대한 초선의원들의 말말말. 그래픽=김문중 기자

'소신정치'에 대한 초선의원들의 말말말. 그래픽=김문중 기자


"우린 정치양극화의 피해자" 초선들의 변명과 고민

더불어민주당 초선모임 '더민초'는 2021년 7월 26일 국회 소통관에서 당내 대선후보들을 개인별로 초청하여 정치철학과 비전, 대선공약을 묻는 후보 초청 비전토크콘서트을 추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홍기원, 오기형, 고영인, 윤영덕 의원. 오대근 기자

더불어민주당 초선모임 '더민초'는 2021년 7월 26일 국회 소통관에서 당내 대선후보들을 개인별로 초청하여 정치철학과 비전, 대선공약을 묻는 후보 초청 비전토크콘서트을 추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홍기원, 오기형, 고영인, 윤영덕 의원. 오대근 기자

초선들이 처음부터 '패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21대 국회 초반, 국민의힘 내에서는 '명불허전 보수다' 등 초선 공부모임이 활발히 운영됐다. 위기에 놓인 보수정당의 체질개선과 혁신을 위해 정책을 연구하고 의정활동 방향성을 세웠다. 민주당에서도 초선들을 중심으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을 향한 매서운 비판과 4·7 재보궐 선거 참패에 대한 자기반성이 쏟아졌다.

여야 초선들은 '초선 정치'가 실종된 기점을 지난 대선 이후로 꼽는다. 각 당의 초선의원들이 각기 다른 대선후보 캠프에 합류하면서 분화가 이뤄져 결집력이 약해졌고, '비호감 대선'을 거치는 동안 상대를 악마화하는 정치문화가 굳어지면서 소수의견을 허용할 여유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때문에 초선 개인에게 '정치 퇴행'의 책임을 덧씌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반론도 없지는 않다. 정치양극화는 국민 절반의 정치적 의사 표시를 사장시키고 다당제 정착을 막는 현행 소선거구제 개혁이나 비례대표 확충 등 제도적 문제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충청지역의 한 민주당 의원은 "의원 몇 명의 '쓴소리'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지경에 왔다"며 "정쟁보다 더 큰 문제는 정치의 기본규범과 사회적 가치규범이 무너진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 "초선이 정치양극화의 원인이자 결과"

국민의힘에 입당한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2021년 8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초선 공부모임 '명불허전 보수다 시즌5' 초청 강연에 참석해 강연을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국민의힘에 입당한 윤석열 대선 예비후보가 2021년 8월 2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국민의힘 초선 공부모임 '명불허전 보수다 시즌5' 초청 강연에 참석해 강연을 하고 있다. 오대근 기자

전문가들도 이런 내부진단에 대체로 동의한다.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주류로 편입되지 않은 초선은 생존하기 쉽지 않다. 같은 당 초선들 사이에서도 이념적으로 양극화되고, 이게 국회 전반으로 확대된 것"이라며 "특히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한 지지층과의 접촉면이 확대되면서 내 편에 순종하는 '알리바이'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수는 "많은 숫자로 '파워집단'을 형성했지만 정치적 보신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초선들이 정치양극화의 원인인 동시에 결과이기도 하다"고 진단했다.

24일 통계청이 발표한 '2022 한국의 사회지표'에 따르면, 지난해 국회에 대한 국민 신뢰도는 전년보다 10%포인트 이상 떨어진 24.1%인 것으로 조사됐다. 우리나라 정부기관 중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이대로 국회를 둬서는 안 된다"는 초선의원들의 호소를 그냥 하는 말이나 정치적 수사쯤으로 흘려들어선 안 되는 이유다.

김민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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