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용서했다는 착각

입력
2023.04.04 04:30
26면
구독

편집자주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 조사 때 제출한 9줄짜리 사과문으로, 2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인 무소속 민형배 의원이 강원도교육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다. 정모군은 2018년 민족사관고 학폭위에 2차례 서면 사과문을 제출했다. 사진은 정순신 아들이 학폭위에 제출한 첫 번째 사과문. 연합뉴스

국가수사본부장에 임명됐다가 낙마한 정순신 변호사의 아들이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학폭위) 조사 때 제출한 9줄짜리 사과문으로, 2일 국회 교육위원회 소속인 무소속 민형배 의원이 강원도교육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다. 정모군은 2018년 민족사관고 학폭위에 2차례 서면 사과문을 제출했다. 사진은 정순신 아들이 학폭위에 제출한 첫 번째 사과문. 연합뉴스

'정순신 사태'로 학교폭력(학폭)이 세상을 뜨겁게 달군 지 한 달이 넘었다. 어디를 가도 이 얘기를 할 정도로 모두가 분노했다. 그러나 그 열기는 한순간뿐, 허탈함만 테이블을 채웠다. '있는 집 자식과 부모'는 남을 해쳐도 당당했고, 피해자를 짓밟아도 다시 권력에 오를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씁쓸한 현주소다.

그러나 한 달간 피해자를 위한 메시지가 단 한 개도 없었다는 게 더 씁쓸하게 만든다. 권력자들은 공정과 정의를 비웃듯 '그깟 학폭이 뭐, 우린 잘못한 게 없는데'란 당당함으로 맞섰다. 피해학생에게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기대했지만, 큰 실망으로 돌아왔다. 지난달 31일 국회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정순신 청문회'는 정 변호사가 돌연 '공황장애'를 이유로 불출석 사유서를 내며 연기됐다. 윤희근 경찰청장의 "(정 변호사가 국가수사본부장) 후보자 중 상대적으로 나았다", 유상범 국민의힘 의원의 "아들이 본부장에 임명된 게 아니잖느냐"는 발언이 괜히 나온 게 아니었다.

이 과정을 지켜보며 '피해자는 결국 시간만 가기를 바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해결해 준다는 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큰 착각이었다는 걸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어느 날 카카오톡 단체방에 올라온 사진 덕분이었다. 학창 시절 새내기 교사였던 한 선생님이 교감으로 승진한 사진, 그 선생님은 바로 나에게 학폭을 가한 가해자였다.

드라마 '더 글로리' 의 한 장면. 고등학생 문동은이 학교폭력을 당한 뒤 경찰에 신고했지만 선생님의 질타를 받는 모습. 넷플릭스 제공

드라마 '더 글로리' 의 한 장면. 고등학생 문동은이 학교폭력을 당한 뒤 경찰에 신고했지만 선생님의 질타를 받는 모습. 넷플릭스 제공

폭력의 발단은 '돈'이었다. 진학 목표가 비슷했던 학생들과 특별반이 꾸려졌고 그 선생님이 담당했다. 하지만 당시 집안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기에 특별반에서 빠지고 싶다고 했지만, 선생님은 폭력으로 답을 대신했다. 폭력은 아무도 보지 않을 때 이뤄졌다. 난 그렇게 선생님의 수고에 성의 표시를 하지 않는 '나쁜 학생'이 되고 말았다.

그 선생님과 다시 대화할 수 있었던 건 그래도 나름 알려진 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다. 아무렇지 않게 "거기 붙었다며"라고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사과는 없었다. 그저 그때 내 형편을 자책하며 선생님을 용서했다. 그때의 기억을 끊어낼 유일한 방법은 외면뿐이었다.

하지만 너무 큰 착각이었다. 내가 용서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십수 년이 지났음에도 가해자인 선생님이 최고의 자리에 오른 사진 한 장에 그때의 상처가 떠올랐던 것처럼, 폭력은 결코 시간이 해결해 주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는 그 괴로운 시간에 갇힐 뿐이다. 문동은(드라마 '더글로리'의 주인공)의 몸에 남은 '고데기 열 체크' 자국처럼 지울 수 없이 안고 살아야 할 상처다.

"결국 가해자가 이기는 세상이구나." 피해학생이 당시 아버지의 힘으로 정군의 강제 전학이 지연되는 모습을 보며 한 말이다. 어쩌면 그는 이때부터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는 자신의 고통을 예견한 건 아니었을까. 정치권과 언론에 그때 사건이 언급될 때마다 자신을 더욱 가둘지 모르겠다.

그러나 벗어날 수 있다. 폭력으로 부서진 피해자들의 세상을 복원하는 방법은 이미 이 학생의 말에 담겨 있다. 가해자가 이겨선 안 되는 세상이란 정의가 실현되면 된다. 이는 가해자만이 할 수 있다. 그 첫걸음은 정군과 정 변호사의 진심 어린 사과다. 그리고 많은 이가 해야 할 말이 있다. 어른으로서 미안하다고.




류호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