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폭 피해자와 방관자 사이에 선 자녀를 보며

입력
2023.04.05 04:30
22면
구독

전지영 '말의 눈' (현대문학 4월호)

편집자주

단편소설은 한국 문학의 최전선입니다. 하지만 책으로 묶여나오기 전까지 널리 읽히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국일보는 '이 단편소설 아시나요?(이단아)' 코너를 통해 흥미로운 단편소설을 소개해드립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엄마, 내가 누굴 죽도록 때리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아, 내가 죽도록 맞고 오면 더 가슴이 아플 것 같아?" 전 세계 시청자를 사로잡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가 밝힌 대본 집필의 계기다. 그는 고등학생 딸이 던진 질문이 지옥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드라마는 권선징악에 가까운 답을 내놨지만 현실에서 단 하나의 답을 단호히 내놓을 수 있을까.

현대문학 4월호에 실린 전지영 '말의 눈'은 학교폭력(학폭) 피해자에서 방관자가 된 딸을 둔 여자의 내밀한 감정을 응시한다. 자기 자식을 지키려 애쓰다가 주인공이 느끼는 혼란은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그 자체다. '당신이라면.'

주인공 수연은 열 달 전 딸 서아와 함께 섬으로 이사왔다. 딸이 학폭을 당한 일이 계기다. 여섯 명의 가해 학생 부모들이 매일같이 사과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을 쏟아냈고 가해자들은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학교폭력위원회는 분반 조치로 사건을 일단락했다. 과정도 결과도 의문투성이였으나 "일을 키우지 말라"는 남편과 딸의 말에 수연은 물러섰다. 섬 생활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무엇보다 딸이 조금씩 회복됐기 때문이다. 소아정신과에서 처방받은 약을 먹는 횟수가 줄었고 입을 닫았던 아이의 말문도 트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이 터졌다. 수연이 거주하는 타운하우스 이웃 지희의 딸이 학폭 가해자로 지목된 것. 문제는 사건 정황이 담긴 폐쇄회로(CC)TV 영상 속에 폭력 현장을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켜본 서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희는 자신의 딸은 친구가 시킨 대로 한 가해자이자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서아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부탁한다. 열 달 동안 겨우 잔잔해진 수연의 마음에 태풍이 몰아친다.

전지영 작가.

전지영 작가.

작가는 수연의 복잡한 감정을 여러 각도에서 파고든다. 소설은 딸에게 섣불리 그 상황을 물어보지 못하는 망설임과 학폭 현장을 목격한 딸이 그곳에서 느낀 솔직한 생각을 전해줬을 때 당혹감을 함께 보여준다. "다행이라는 생각. 내가 아니라, 다른 애라서. 세상에 맞는 사람과 때리는 사람만 있다면, 나는 차라리 때리는 쪽이 되고 싶었어. 그때 구경하던 애들도 그랬겠지." 딸의 답에 수연은 어떤 대꾸도 못한다. 그 말이 자신의 "솔직한 심정"과도 같지만 그 사실을 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모순적인 상황에 처한 것이다.

지희의 사고는 수연의 마음은 크게 흔들어 놓는다. 지희는 수연을 설득하려고 그의 집 수리를 돕다가 다쳐 응급실에 실려간다. 수연은 자신과 딸의 상처를 헤집어 놓을까 두려워서 그런 지희가 "깨어나지 못하길 바라는" 섬뜩한 생각까지 한다.

소설은 도덕적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그저 제대로 아물지 못한 상처가 또 다른 이에게 생채기를 내는 과정을 조용히 따라갈 뿐이다. 폭력의 악순환 속에서 아이들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란 건 있는 건지, 그 방법을 우리가 과연 선택할 수 있는 건지 소설은 독자에게 되묻게 한다.




진달래 기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