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피할 수 없는 '전화 한 통'… "근로시간 포함될까?"

입력
2023.04.13 04:30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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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휴가·휴일 중 몇 분 남짓 업무처리
일한 건 맞는데, 초과근로라기엔 애매
법상 '근로' 맞지만, 사회통념상 '쉬쉬'

편집자주

월급쟁이의 삶은 그저 '존버'만이 답일까요? 애환을 털어놓을 곳도, 뾰족한 해결책도 없는 막막함을 <한국일보>가 함께 위로해 드립니다. '그래도 출근'은 어쩌면 나와 똑같은 문제를 겪고 있는 노동자에게 건네는 전문가들의 조언을 담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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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대리, 휴가인데 전화해서 미안… "

6년 차 대기업 직장인 김모(33)씨. 시차가 없는 일본 여행을 간 것이 잘못이었을까. 평소에도 종종 '퇴근했는데 미안' 스킬을 사용했던 상사는 급기야 '휴가 갔는데 미안' 스킬까지 꺼내 들었다. '미안한 걸 안다면, 전화를 안 하면 되잖아'라는 생각도 잠시, 상사는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급해서 그런데 저번에 보내준 자료, 이메일 확인이 안 되는데 다시 보내 주면 안 될까?"

'당신 이메일 다시 확인해 보세요'라는 말이 튀어나올 뻔했지만 목구멍 밑으로 꾹꾹 눌러 담았다. 대신 최소한의 사무적 친절함을 담아 "네"라는 짧은 답변으로 전화를 마쳤다. 전체 통화시간은 채 3분도 안 됐다. 보낸 편지함을 다시 확인해 보니 지난번 보낸 메일은 '전송 완료' 상태. 사내 메신저가 고장 나지 않는 이상 이메일은 분명 100% 전송됐을 것이다.

"평소에도 '퇴근했는데 미안'이라면서 전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전화를 안 받는 게 더 신경 쓰여서 무조건 받는 편이지만 대부분의 용건은 본인들이 직접 처리 가능한 일들이다. 물론 진짜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한 시간도 안 걸리는 업무를 했다고 추가근로시간으로 상신할 순 없었다."

"미안하면, 연락하지 마시죠"

15분도 채 안 되는 한 번의 통화. 끽해야 몇 번 주고받는 문자메시지. '근로'라고 하기엔 애매하지만 그렇다고 또 '근로'가 아니라고는 할 수 없는 근로시간들. 휴일인데 미안하다고, 퇴근 후인데 잠깐만, 휴가 중인데 한 번만. 요청의 탈을 쓴 강제 앞에서 오늘도 전국의 수많은 김 대리는 전화와 문자를 받는다. 당신의 근로 아닌 근로는 과연 근로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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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IT)기업에서 디자인 마케터로 일하는 송모(35)씨도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다. 송씨 회사의 근태관리는 인력관리 솔루션으로 유명한 외주 프로그램을 도입해 운영 중이다. 상사한테 눈도장 찍을 필요 없이 휴대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애플리케이션(앱)으로 초과근무시간을 10분 단위로 등록할 수 있다.

그러나 최첨단 시스템도 송씨의 애로를 다 풀진 못했다. 문제는 시스템이 아닌 사람이기 때문이다. 송씨가 팀장과 함께 회의를 하고 초과근무를 등록하는 건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에이전트나 타 부서 관계자들과 퇴근 후 또는 휴일 중 연락할 때다. 통화한 시간이나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간은 대부분 5분 남짓. 많을 때는 5번 이상 연락을 받는 경우도 생긴다.

원칙적으로 보자면 송씨는 근로시간 외 추가 근로를 한 것이다. 그러니 앱을 열어서 통화나 문자 주고받은 시간만큼 등록하면 끝이다. 하지만 팀 구성원 누구도 감히 등록할 수 없었다. 승인권자인 팀장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기 때문이다. 동료들도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지만, 감히 팀장을 시험에 들게 할 용기 있는 직원은 없었다.

송씨는 "똑같은 프로그램을 사용 중인 다른 회사 직원들은 별도의 승인권자를 설정하지 않은 덕분에 양심껏 근무시간을 기록하면 된다고 하는데, 우리 회사는 양심 문제를 떠나서 제대로 일한 것도 눈치가 보여 기록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10명 중 9명이 업무 지시받아"

한국 직장인에게 '연결되지 않을 권리'는 없다. 근무시간 외 업무지시가 너무나도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2021년 말 경기연구원이 경기도 거주 임금근로자 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를 보면, 무려 87.8%가 "근무시간 외 업무지시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대략 10명 중 9명은 퇴근·휴일·휴가에도 일을 했다는 얘기다. 업무지시 빈도는 '한 달에 한 번'(37%)이 가장 많았고, '일주일에 한 번 이상'(34.2%)이 두 번째였다. 불가피한 경우 가끔 넘어갈 수도 있지만, 근무시간 외 업무지시가 사실상 고착화한 비중도 꽤 상당한 것이다.

그럼 도대체 상사들은 왜 근로시간이 아닌 시간에 연락을 하는 걸까. '외부기관·상사 등의 갑작스러운 업무 처리 요청 때문'이 전체의 70%를 차지했다. 백 번 양보해서 그나마 불가피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생각난 김에 지시하려고(20.1%)', '시간에 대해 민감하게 생각하지 않아서(5.1%)', '상대방이 이해해 줄 것으로 생각해서(4.2%)' 등 분노 유발 사유들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일을 시키면 과연 일이 손에 잡힐까. '지시받은 업무가 내일 출근 이전까지 처리돼야 하는 급한 업무'일 경우 '처리한다'고 대답한 비율은 무려 90%에 달했다. 심지어 '내일 출근시간 이후부터 처리해도 되는 급하지 않은 업무'일 경우에도 40.6%의 응답자가 '처리한다'고 밝혔다. 10명 중 4명이 상사 지시로 인해 내일 회사에 가서 해도 될 일을 구태여 오늘 퇴근 후 붙잡고 있다는 얘기다.

"1분만 더 일해도 초과근로"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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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적으로 근로계약에 따른 근로시간을 넘어선 근로는 모두 초과근로에 해당한다. 권남표 직장갑질119 노무사는 "5분이든, 1분이든 근로계약 체결 후 사용자의 지시 명령 아래 있는 시간은 근로기준법상 근로시간"이라며 "짧게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주고받는 것도 사용자 지시에 따른 일이기 때문에 근로시간으로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초과근로로 인정될 경우에는 수당도 지급받을 수 있다. 권 노무사는 "초과근로는 통상임금의 0.5배를 가산해 근로자에게 지급해야 한다"며 "보통 노동자들이 시급을 모르는 경우가 많지만 근로계약서상 근로시간을 분 단위로 나누면 계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현실에선 분 단위 초과근로로 문제를 제기하는 직장인은 극히 드물다고 한다. 노동자 스스로도 몇 분 단위 초과근로를 인정받는 데 대해 소극적이거나, 실제 실익이 적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김유경 돌꽃노동법률사무소 대표 노무사는 "일과 전, 일과 후 근로가 정기적으로 고착화한다면 이는 초과근로로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비정기적으로 이뤄지는 몇 분 단위 근로는 사회통념 등을 고려하면 초과근로로 입증받기가 쉽지 않다"고 조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로부터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국회에는 이른바 '퇴근 후 카톡 금지법'이라 불리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지난 국회에 이어 이번 국회에도 발의된 상태다. 프랑스는 이미 2017년 1월부터 ‘근로자의 연결차단권’을 법제화하기도 했다. 김 노무사는 "휴일이나 퇴근 후 업무 연락을 할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가 당연시되는 문화는 또 다른 문제"라며 "사용자가 노동자의 휴식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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