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도 '노예의 삶' 살지 않으려면..." 2000년 전 노예 출신 철학가에게서 배우는 자유

입력
2023.05.24 04:30
수정
2023.05.24 07:1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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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아 철학자 에픽테토스 '강의' 완역한 고전학자 김재홍 인터뷰

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정암학당에서 만난 고전학자 김재홍 연구원. 그리스·로마 원전 연구 학술단체인 '정암학당'의 벽 한쪽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지중해의 지정학적 맥락을 보여주는 지도가 걸려 있다. 홍인기 기자

5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정암학당에서 만난 고전학자 김재홍 연구원. 그리스·로마 원전 연구 학술단체인 '정암학당'의 벽 한쪽에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 지중해의 지정학적 맥락을 보여주는 지도가 걸려 있다. 홍인기 기자

"의학이 몸의 병을 치료한다면 철학은 영혼을 치료한다고 보는 것이 헬레니즘 시대의 생각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고대 서양 철학'이라 하면 곧장 떠오르는 이름들이다. 반면 헬레니즘 시대부터 시작해 전기 로마시대까지 성행한 '스토아학파'는 상대적으로 홀대받았던 것이 현실. 그런데 몇해 전부터 잭 도시 트위터 창업자를 비롯하여 미국 실리콘밸리에 스토아 철학 열풍이 불더니 최근 한국에서도 관련 저서가 심심찮게 출간되고 있다. 후기 스토아 철학의 정수라고도 할 수 있는 고전, 에픽테토스의 '강의(그린비 발행)'는 특히 주목할 만한 책이다.

지난 5일 서울 서초구 정암학당에서 4년간의 작업 끝에 '강의'를 국내 최초로 원전 완역한 김재홍(66) 정암학당 연구원을 만났다.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전공자인 그가 '강의' 번역을 마음먹은 건 1999년. 캐나다 토론토대의 '고중세 철학 합동 프로그램'에서 원전을 처음 접하면서다. 뇌경색 투병을 거치면서 그 역시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통해 새로운 삶의 의미를 깨닫고, 영혼을 치료하는 철학의 힘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에픽테토스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면 '참아라 견뎌라'입니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사건이고, 중요한 건은 내가 판단 주체라는 점이에요. 자유 의지를 가진 내가 적절히 극복해나갈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해요."

에픽테토스는 '정신적 자유'를 필생의 주제로 천착했다. 신체와 정신이 제도에 예속된 노예 출신이었기에 필연적 귀결일지도 모른다. 에픽테토스는 사유의 근원이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과 '우리에게 달려있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하며 이를 구분할 줄 아는 것이 곧 철학이라 봤다. 우리의 행위에 달려있지 않은 외부적 힘에 의해 일어나는 것들에 매달려 사는 일이야말로 '노예의 삶'이라는 주장이다. 책은 무명의 상대자와의 질의응답 형식의 대화로 진행되는데 쉽게 읽히는 입말을 따라가다 보면 자유로운 삶과 행복의 기술을 조금씩 깨우치게 된다.

"인기, 명예, 죽음, 부, 건강 같은 것들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내가 내릴 수 있는 판단과 믿음 그리고 그 결정의 도덕적 근거가 나에게 있다는 것을 구별할 수 있다면 행복하고 순조롭게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에픽테토스는 말해요."

김재홍 연구원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전공자이지만 나이가 들어 인생을 반추하면서 현실적 삶과 행복에 주안점을 둔 스토아 철학의 진가를 알게 됐다고 한다. "역시 나이가 드니까 '어떤 태도를 갖고 삶의 마지막을 살아갈 건가'를 고민하게 돼요. 후기 스토아 철학자의 대표적 인물인 에픽테토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더 자주 찾게 되더라고요." 홍인기 기자

김재홍 연구원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전공자이지만 나이가 들어 인생을 반추하면서 현실적 삶과 행복에 주안점을 둔 스토아 철학의 진가를 알게 됐다고 한다. "역시 나이가 드니까 '어떤 태도를 갖고 삶의 마지막을 살아갈 건가'를 고민하게 돼요. 후기 스토아 철학자의 대표적 인물인 에픽테토스, 세네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더 자주 찾게 되더라고요." 홍인기 기자

에픽테토스라는 이름은 대중에 여전히 생소하지만 초기 기독교 철학자인 오리게네스에 따르면 당시 문헌학자들에게만 주로 읽혔던 플라톤보다 에픽테토스의 책이 더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노예 출신 철학자의 책은 로마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닳도록 베껴 읽을 정도였는데 그가 스토아 철학자로서 '명상록'을 쓰는 데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번에 완역된 '강의'는 에픽테토스의 제자인 아리아노스가 기록한 것으로 총 8권이었으나 현재는 4권과 일부 단편만 남아 있다. 아리아노스는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 '엥케이리디온'을 썼는데, 이는 고대 그리스어로 '손안에 든 것'이라는 뜻으로 당대 시민들이 손에 쥐고 다니며 읽었다고 한다.

기원후 50년 즈음 태어나 130년께 죽은 고대 철학자, 에픽테토스. 2,000여 년이나 동떨어진 생각이 풍요로운 문명 아래 신분 차별이 사라진 현대인에게 줄 수 있는 가르침이 있을까. 오히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인해 모두가 실시간으로 연결되어 일거수일투족을 비교하게 되고, 일터에 예속되어 자율성을 잃은 모습이야말로 '노예적 삶'과 진배없을지도 모른다. '강의'에는 '자유'라는 단어가 160번 나올 정도로 에픽테토스는 자유를 강하게 열망했다. 오늘날로 따지면 미국 대통령보다 권력이 강한 마르쿠스 역시 그의 영향을 받아 내면의 자유를 강조했으니 자유를 향한 인간의 열망은 동서고금과 지위고하를 달리하지 않는 셈.

"오늘날 현대인은 물질적으로 참 풍요롭고 걱정이 없죠. 하지만 인간은 늘 실존의 불안을 갖고 있습니다. 동시에 젊은 친구들은 주어진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약해져 높은 자살률 문제도 심각합니다.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불안을 극복하는 능력을 메워주는 게 바로 스토아 철학입니다. 이론적이기도 하지만 굉장히 실천적이며 인간의 마음을 치료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심어줍니다."

각 페이지마다 절반이 주석으로 빼곡하다. 옮긴이 해제는 100페이지가 훌쩍 넘어 '강의를 위한 강의'라 칭해도 손색없을 정도다. 김 연구원은 원문이 가진 정확한 의미를 밝히는 게 고전학자의 임무라 믿기에 영국 옥스퍼드대에 소장된 12세기 필사본을 저본으로 삼았다. 이는 현재 전해져오는 에픽테토스 '강의' 중 가장 오래된 텍스트다.

두꺼운 벽돌 철학책의 만듦새만 보고 지레 겁먹기 쉽지만 자유를 욕망하는 독자라면 책의 머리말보다 앞서 인용되며 에픽테토스의 철학을 가장 명징하게 보여주는 이 한 문장에 기꺼이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수 없으리라. "자유로운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사는 사람이며, 강요받을 수도 없고, 제약받지도 않고, 강제되지도 않으며, 그 충동이 방해받지 않는 사람이며, 자신의 욕구를 성취하는 사람이며, 자신이 회피하고자 하는 것에 빠지지 않는 사람이네." (제4권 제1장 1절)

에픽테토스 강의 전권 표지. 그린비 제공

에픽테토스 강의 전권 표지. 그린비 제공



이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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