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나라는 가해자 편"... 천안 고교생 학폭 피해 유서 남기고 극단 선택

입력
2023.05.25 17:17
수정
2023.05.25 19:26
구독

수첩에 피해 내용·일지·답답한 심경 적어
경찰, 교사·학생들 상대로 경위 조사 중
피해 학생·유족 "학교가 1주일간 방관"
학교 측 "상담 당시 학폭 얘기 없었다"

지난 11일 학교폭력을 호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천안 지역 모 고등학교 3학년 김상연군의 수첩에 적힌 유서. 김상연군 유족 제공

지난 11일 학교폭력을 호소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한 천안 지역 모 고등학교 3학년 김상연군의 수첩에 적힌 유서. 김상연군 유족 제공

충남 천안에서 고교 3학년 학생이 학교폭력 피해를 호소하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해 경찰이 수사에 착수했다. 유족은 학교 측이 학교폭력 피해를 수수방관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25일 고(故) 김상연(18)군 유족 등에 따르면, 김군은 지난 11일 오후 7시 15분쯤 천안시 동남구 자신의 거주지에서 심정지 상태로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1시간 40여 분 후에 숨졌다. 김군이 발견된 현장에선 극단적 선택을 추정케 하는 흔적이 있었다.

김군 수첩에 적힌 유서 형식의 글에는 3년간의 학교폭력 피해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다. 김군은 가해 학생들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욕설을 하고, 우스꽝스럽게 나온 자신의 사진을 올렸다고 적었다. 다른 지역에서 왔다는 이유로 지역 비하적 단어를 반복해 놀렸다고도 했다.

김군은 유서에 "학교폭력을 당해 보니 왜 아무한테도 얘기할 수 없는지 알 것 같다. 이 나라는 가해자 편이니까. 피해자가 되어봤자 힘든 건 자신뿐"이라며 "내 꿈, 내가 하는 행동 모든 걸 부정당하니 온 세상이 나보고 그냥 죽으라고 소리치는 것 같다. 너희들 소원대로 죽어줄게"라고 적었다.

그러면서 "(학교 폭력 가해자 처분) 1~3호는 생활기록부에 기재조차 안 된단다"라며 "안타깝지만 나는 일을 크게 만들 자신도 없고, 능력도 없다. 내가 신고한들 뭐가 달라질까"라고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김군은 "담임 선생님과 상담 중 학폭 얘기가 나왔지만 선생님은 나를 다시 부르지 않았다. 선생님이 부모님께 신고하지 못하게 겁을 준 것 같다"고도 했다. 학교 측이 자신의 학폭 피해를 인지하고도 모른 척했다고 본 것이다.

김군의 유족도 유사한 주장을 했다. 유족은 이달 초부터 김군이 학폭을 호소하며 학교에 가지 않아 지난 4일 학교폭력위원회를 열어 달라고 요청했지만 학교에선 '학폭이 없었다'며 상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1주일간 손을 놓고 있었다고 했다. 김군 유족은 "아들이 세상을 제대로 구경하지도 못한 채 얼마나 힘들고 억울했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진다"고 울분을 토했다.

학교 관계자는 그러나 "담임 교사는 '김군이 상담 당시 학교폭력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다. 다만 학생 상담을 모두 마치면 다시 상담하기로 했는데 바쁜 업무 등으로 이를 깜빡했다'고 했다"며 "유족이 학폭위를 요청했다고 하는데, 그런 요청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고 말했다.

충남교육청 관계자는 "3년간 김군의 학폭 피해가 인지되지 않아 학폭위가 열린 적이 없으며 최근 김군이 결석을 자주 해 학교 측에서 부모에게 안내한 것으로 파악됐다"며 "학폭 여부에 대해 경찰 수사가 진행 중인 만큼 최대한 협조하면서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에 따라 조치할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김군 유족의 고소장을 접수하고, 김군의 1~3학년 담임교사 3명과 같은 반 학생 등을 상대로 자세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김군의 스마트폰과 노트 등을 분석해 실제 학교폭력이 있었는지도 확인하고 있다.

경찰 수사로 학교폭력 가해 사실이 확인되면 해당 학생들은 처벌을 받게 된다. 다만 학교 측이 김군과 유족 측 주장대로 학교폭력을 수수방관했더라도 형사처벌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찰 관계자는 "학교폭력 인지 후 학교 측의 대응 지침을 규정한 학폭 예방법이 있지만 형사처벌 대상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천안= 최두선 기자

관련 이슈태그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 Copyright © Hankookilbo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