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자상했던 아버지가..." 걸핏하면 소리치고 막말

"그 자상했던 아버지가..." 걸핏하면 소리치고 막말

입력
2023.07.03 04:30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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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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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어린시절 가정적이고 유순했던 아버지가 한 번 욱하면 말릴 수 없는 성격으로 변했어요. 예를 들어 식당에서 종업원이 작은 실수라도 하면 사과만 듣고 넘기지 못합니다. 주변사람들까지 미안해질 정도로 직원을 붙잡고 엄청나게 몰아세워요. 갱년기 증상인가 싶다가도 분노의 정도와 빈도가 점점 심해지다 보니 정말 무슨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걱정이 됩니다.

저희 집은 평범했습니다. 가족 간에 사이도 좋았고 주말이면 여행도 많이 하면서 시간을 보냈어요. 부모님은 맞벌이라 바쁘셨지만 저와 언니에게는 신경을 많이 쓰셨고, 특히 아버지는 다른 친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자상하게 잘 놀아주셨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그런 시간이 줄긴 했지만 그사이에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어요. 다만 할머니와 관련된 마찰은 가끔 있었어요. 할머니는 가부장적인 성향이고 주장도 강하신 분입니다. 종종 저희 집에 오시거나 명절에 뵈면 그런 면모를 어김없이 드러내셨죠. 손녀들을 차별하고 며느리를 대놓고 구박하셨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할머니 말이라면 뭐든 들었어요. 예를 들어 운전이라곤 모르시는 할머니가 내비게이션과 반대로 가자고 하는데 막다른 길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할머니 주장대로 따른 적도 있어요. 아버지는 늘 순종적이었고, 그래서 부모님 사이에는 할머니와 관련된 다툼이 늘 있었습니다.

그 외에는 집안 분위기가 좋았고, 제가 보는 아버지의 모습은 늘 유쾌하고 침착했죠. 아버지가 언성을 높이는 걸 한번도 들은 적이 없고, 자식들을 혼낼 때도 항상 대화로 해결하는 분이었어요. 그런데 제가 성인이 될 무렵부터 변하기 시작하셨죠. 똑같은 행동을 해도 그날 감정에 따라 크게 화를 내기도 하고, 웃으면서 넘어가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어 대학생이던 저나 언니가 집에 늦게 들어올 때 어떤 날은 몇 시간이고 세워두며 꾸지람을 하고, 어떤 날은 '대학생이니 그럴 수 있다'며 웃어넘기셨어요. 아버지가 소리를 지르는 모습 자체도 놀라웠지만 명확한 기준 없이 그날 기분에 따라 달라지는 모습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어요. 제 입장에서는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아버지가 50대에 접어들었기에 갱년기라고 생각하며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외식을 했을 때 식당에서 가족 모두를 충격에 빠뜨린 사건이 있었어요. 직원이 주문과 맞지 않는 요리를 가져다주고 서빙을 하면서 소스를 아버지 옷에 흘리는 작은 실수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그 직원을 붙잡고 몰아붙이며 언성을 높이셨죠. 사과를 하고 요리를 다시 가져다주었지만 분노를 참지 못하셨고, 같이 간 일행도 아버지 눈치를 보며 분위기가 얼어붙었습니다. 점주가 사과를 하며 음식 값을 받지 않겠다고 할 정도였지만 분이 풀리지 않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아버지는 점점 더 크게 화를 내고, 막말도 자주 하셨습니다. TV에 등장하는 연예인을 향해 심한 말을 퍼붓고 어머니에게 별거 아닌 일로 화를 내고 상처 주는 말을 해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와 언니는 "본인이면 기분이 어떨 것 같냐"며 역지사지형 말을 해보기도 하고, 아빠가 예전엔 차분하고 감정 기복이 적었는데 요즘은 화를 너무 많이 내서 걱정이 된다고 진지하게 얘기를 했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예상도 할 수 없는 일들로 화를 내고, 막말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온 가족이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아버지는 권위주의적인 분은 아니지만 화를 낼 때마다 반박하거나 맞서기는 쉽지 않아요. 그래서 그냥 넘기거나 모른 척하는데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하니 스트레스가 심합니다. 아버지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느낌이에요. 저와 언니는 아버지와 더 이상 긴 대화를 나누지 않아요.

가끔은 치매 초기가 아닐까 걱정도 들어요. 아버지와 대화를 하다 보면 자꾸 핵심을 피하는 말을 중언부언 늘어놓습니다. 상담이나 검사를 받았으면 좋겠는데 말을 꺼내면 다짜고짜 화부터 낼 것 같아요. 아버지가 갑자기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정은(가명·29·강사)


정은씨, 인간은 누구나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하고 정서적 안정감을 유지해야 해요. 안정적인 정서 상태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필수 요소죠. 아버지의 불안정한 정서를 지켜보면서 가족들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을지 충분히 이해합니다. 아버지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드리고, 무엇보다 가족들의 정서적 안정을 도모하기 위해선 먼저 아버지의 내면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정서적 안정감은 타고난 기질도 관련되지만, 양육 과정을 통해 정서를 다루는 법을 익혀가는 것이 큰 영향을 미칩니다. 정은씨의 아버지는 억압적인 부모 슬하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입니다. 부모와 편안하게 소통하며 자신의 감정을 적절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주장이 세고 완강한 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타인에게 맞추는 방식에 익숙해졌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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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한 에피소드에서도 드러나듯이 아버지는 뻔히 틀린 방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생각과 감정에 맞추는 방식으로 순응하며 살아왔어요. 강압적인 어머니의 감정처리 방식 때문에 특히 자신의 부정적인 감정 표현을 지나치게 억압한 것이죠. 부모와 솔직한 감정 교류를 하지 않고, 타인을 대할 때도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해 왔기 때문에 겉으로 보기엔 내면의 갈등이 드러나지 않았을 거예요. 과거에 아버지가 매사 침착하고 평온한 것처럼 보였고 열심히 놀아주셨더라도 내면에는 스스로 나쁜 것이라고 인식되는 수많은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정서 발달이 온전하게 잘 되려면 자신이 느끼는 감정 상태를 잘 알아차려야 해요. 불편한 감정을 정확히 감지해야 그 원인이 어디에 있을지 파악하고 그에 맞게 대응하며 감정을 다루는 방식을 배울 수 있기 때문이죠. 아버지는 그런 훈련이 충분히 돼 있지 않은 분 같아요. 이런 과정을 충분히 훈련하지 못하면 상황이 조금만 부정적으로 흘러가도 쉽게 화가 납니다. 화가 나는 마음으로 인해 과도하게 언성을 높이고 막말을 하기도 하고요.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스스로도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조절하지 못하고 감정의 상태에 쉽게 끌려다닌다는 얘기예요. 부정적 감정을 표현하면 상대방과의 관계가 나빠진다고 느끼면서 평생 부정적 감정을 억누르기만 했던 아버지는 어떤 계기로 그 감정을 드러내게 되면서 혼란에 빠진 것으로 보입니다. 사연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아버지의 감정을 오랜 기간 억압했던 할머니의 건강 악화나 부고 등 기폭제가 됐던 계기가 있었을 거예요. 흔히 중년의 위기라고 부르는 이 시기에, 정은씨 아버지처럼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반대쪽으로 극단적인 행동을 시도하게 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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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정적 감정은 숨긴다고 사라지지 않아요. 당시에는 억누른다고 해도 나중에 다양한 문제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아버지가 사소한 일에 불같이 화를 낸다거나 과도하게 말을 심하게 해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보입니다. 울화와 분노 같은 부정적 감정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처리하는 방법을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정을 극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죠. 갱년기 호르몬 변화와 관련된 감정 기복 역시 아버지의 상황을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어요.

실질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아버지 스스로 내면에 응어리진 감정을 인식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가장 빠른 방법으로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의 진료를 받아보시길 권합니다. 감정기복과 중언부언하는 대화는 조기 치매뿐 아니라 우울증의 증상일 수도 있어 감별이 필요하고, 남에게 감정을 내보이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아버지가 자신의 미성숙함을 가족에게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죠. 말로 설득하는 것보다 진료를 권유하시면서 의학적으로 접근하시면 좋겠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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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은 아버지가 일생 동안 부정적 감정을 처리하는 방식을 배우지 못했다는 점을 기억하시면 좋겠습니다. 평생 지켜본 가족들에게도 아버지의 응어리진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는 건 참 어려운 일일 거예요. 쉽진 않겠지만 아버지가 분노를 표출할 때마다 지적하거나 항의하지 마시고, '아버지가 감정의 혼란을 겪고 있으시구나'라는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세요. 혼란스럽고 위축된 이 시기에 아버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가족의 지지입니다. 그렇다면 예기치 않은 순간에 정은씨와 가족들이 받는 상처를 훨씬 줄일 수 있을 거예요.

당장은 혼란스럽고 다 같이 힘든 시기지만, 아버지에게는 참 소중한 변화의 시기입니다. 편안하고 행복한 인생을 누리기 위해선 지금이라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인지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시면 됩니다. 그렇게 내면이 한 단계 성장하고 만족스러워지는 아버지와 정은씨 가족이 되시길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 손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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