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동간’이 무서운 남자 친구들에게

입력
2023.02.04 04:30
12면
<104>비동의 간음죄, 답보할 것인가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문화를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이한 작가는 '남성과 함께하는 페미니즘 활동가'로서 성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남녀가 함께 고민해 볼 지점, 직장과 학교의 성평등 교육 현장의 이야기를 담아냅니다.


그저 힘이 센 편에 서 있는 이들, 그러다가 우리의 투쟁으로 세상이 조금 변하고 상식 아니었던 것이 상식이 되면 냉큼 거기 올라타 그다음 변화에 어깃장을 놓을 뿐인 이들은 모른다. … 합리적인 토론이나 이성적인 언쟁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다. 대의도 명분도 없이 . 처음부터 이뿐이었다.
이민경 '우리에게도 계보가 있다' 중

활동을 하며 벽에 부딪힌 것 같을 때, 도무지 더 나아갈 수 없을 것 같고 도리어 퇴보하는 느낌이 들 때, 저 책 구절을 돌이키며 지금의 저항도 한낱 물풀 다발에 지나지 않음을, 차별과 폭력에 맞선 인권운동의 역사가, 순탄치 않지만 그럼에도 나아갈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진다. 최근의 물풀은 비동의 간음죄를 둘러싼 일련의 파열음이었다. 지난달 26일 여성가족부는 제3차 양성평등정책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강간죄 구성요건을 폭행·협박 등 '가해자의 유형력 행사'에서 '피해자의 동의 여부'로 개정을 검토하겠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는 피해자가 폭력 피해에 대한 공포나 위력에 의한 두려움 등 다양한 이유로 얼어붙고 가해자가 물리적인 폭력을 (법에서 성폭력이라 인정할 만큼) '충분히' 행사하지 않은 경우 현행법이 성폭력으로 처벌할 수 없었던 문제를 개선하기 위함이었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의 무책임에 커지는 갈등

"뭐 비동간?"

한 정치인이 앞서 여가부의 비동의 간음죄에 대한 발표 직후 SNS에 남긴 글이다. 익숙한 냉소의 언어가 내용도, 논쟁의 여지도 없이 이른바 '이대남'의 요구라는 식으로 포장되어 올라오고 잇따라 다른 정치인들도 이에 가담했다. 언론에서는 또다시 너무 쉽게 이를 성별 간 '갈등' 정도로 치부하고 이에 놀란 여가부는 급한 불부터 끄고 보자는 식으로 없던 일 취급하고 있다.

이마를 짚었다. 아, 말의 무게를 모르는, 혹은 모른 체 외면하여 갈등과 분열로 잇속을 챙기려는 자들의 냉소로 한동안 또 주변이 시끄럽겠구나. 벌써부터 학교에서 "여가부가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한다던대요?" 같은 질문이 쏟아지는 듯하고, 또 한쪽에서는 "요새 '이대남'은 왜 그래요?" 같은 질문에 끼어 난처해할 미래가 보이는 듯하다.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책임지지 않으면 갈등은 시민들이 살아가는 일상에서 여과 없이 터져나오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마냥 탓하고만 있을 수 있나, 요즘 유행하는 말마따나 누군가는 해야지.

수많은 단체와 사람들의 목소리로 만들어진 비동의 간음죄

당장 고개를 들어 주변의 젊은 남성들에게 '비동간'에 대해 물어본다. 대부분 '그게 뭔데?' 하는 반응 일색이다. 좀 찾아보면 '무고' 같은 무시무시한 말들이 떠도니,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지레 겁먹기 십상이다. 무작정 다그칠 게 아니라 하나씩 곱씹어볼 일이다. 먼저 비동의 간음죄가 수면 위로 드러나기까지 과정은 정치인의 말 몇 마디에 사라질 정도로 간단하지 않다. 그 과정에 무수히 많은 단체와 사람들의 절박하고 오래된 요구가 있었다. 우리 사회, 아니 전 세계적으로 성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알린 '미투 운동'을 기억할 것이다. 우리는 이 운동을 통해서, 사회적 낙인과 편견, 법 제도의 미비가 얼마나 오랜 세월 수많은 성폭력 피해자를 침묵하게 했는지 보았다. 허나 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나도 말한다'(Me Too)고 용기 내어 낙인과 편견을 깨부수는 변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멈출 수는 없었다. 앞서 말했듯 성폭력 판단 기준이 너무나 협소하여 수많은 피해자가 목소리 내지 못하는 현실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착한 마음, 열정적인 교육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법'이라는 확실한 메시지가 병행되어야, 교육과 문화, 우리의 일상에 힘이 생긴다. 이 일련의 과정에 비동의 간음죄가 사람들의 공감을 얻고 영국, 독일, 스웨덴을 비롯한 여러 국가에서 앞서 시행되었으며 각종 국제기구에서도 도입을 권고하고 있다.


'만약에'라는 말에 담긴 의도적 무지

여기까지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갑자기 어떤 '만약에'가 등장하면 모든 논의는 스톱, 이 법의 필요성에 대해 지금까지 설명했던 배경은 다 사라지고 이야기는 원점, 아니 그 이전으로 돌아간다. '만약에' 상대가 합의하여 성관계를 해놓고 변심하거나 악의적으로 동의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며 무고한 범죄자를 만들면 어떻게 하냐는 염려다. 여기에 더해, 그럼 성관계할 때마다 매번 동의를 구해야 하냐며 답답해하거나 계약서라도 써야겠다는 비아냥도 흔하다. 이 염려는 힘이 세다. 무고한 범죄자가 되는 건 무섭고 안 될 일이니까.

그런데 저 '만약에'에는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피해자를 향한 낙인과 여성의 성을 둘러싼 차별어린 시선, 여성에게 취약한 사회구조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성인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도 응당 거절과 동의를 명시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해맑은 개인만 존재할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누구도 진공 속에서 살아가지 않는다. 제아무리 '만약에'를 붙여가며 의도적으로 구조를 지우려 해보아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지금의 성차별적 사회구조 아래, 성폭력 문제는 여성에게 더 취약하다. 심지어 이 사실은 저 '만약에'로 말을 이어가는 사람들도 대부분 알고 있다. 그들은 무고한 '남성' 피해자를 상상하며, 이른바 '꽃뱀'이라 불리는 이들을 염려한다. 그런데 왜 하필 '꽃뱀'일까? 성폭력 피해자가 성별에 무관하게 두루 있다면, 거짓 성폭력 피해로 상대를 무고하게 내모는 이들도 두루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를 일컫는 표현도 성별과 무관한 표현일 텐데 말이다. 이처럼 여성을 잠재적 가해자 취급하는 '꽃뱀'이라는 표현을 쓸 때만 쉽게 켜지는 구조적 사고는 '만약에'에 숨어 있는 의도적 무지를 드러낸다.

내게는 너무나 큰 341명

2018년 한국성폭력상담소 발표에 따르면 강간 피해 사례 중 폭행·협박 없이 발생한 성폭력 사례가 70% 이상이라고 한다. 2020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2017, 2018년 대검찰청의 사건 처리 기록을 분석한 결과, 약 8만 명이 성범죄 처분을 받을 때, 성폭력 무고죄로 유죄를 받은 범죄자는 341명이었다. 아주 단순하게 얘기해서, 성폭력 피해자를 향한 낙인과 차별, 폭력을 뚫고 성폭력을 신고하여 지금의 아주 협소한 법망으로 겨우 잡은 성폭력 범죄자가 8만여 명일 때, '꽃뱀'이라는 용어까지 써가며 공포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존재가 341명이라는 의미다. 이토록 투명하게 다른 공포의 감각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공황발작을 경험해본 덕에 때로 어떤 공포는 객관적인 사실보다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허나 그렇게 드리운 공포의 그림자에 마냥 잠식되어 있을 필요는 없다. 앞서 보았듯 무고에 따른 공포는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고 재판 과정에서도 피해자의 진술만으로 판단하는 게 아닌, 다른 증거들을 두루 고려하여 신빙성을 판단하고 있다. 그럼에도 드는 마음 한편의 공포는 세상의 변화 앞에 선 자에게 따르는 끈질긴 물풀일 것이다. 다행히도 우리는 그 물풀에 얽매이지 않고 같이 나아갈 수 있다. 남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성폭력은 젠더 권력구조의 문제'라는 이야기가, 곧 '남성 개개인의 존재가 문제'라는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 모두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도리어 남성이 이 문제에 함께 참여할 때, 비동의 간음죄에 대한 논의는 성별과 성폭력 문제를 넘어서 우리 사회가 폭력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나아갈 수 있다.

성범죄 처벌규정은 '정조에 관한 죄'라는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졌다. 이때 성폭력은 '여성의 정조' 문제이기 때문에 보호해야 할 정조가 없다고 판단되는 이들(남성, 부부 관계, 성경험 있는 여성, 성노동자 등)은 성폭력을 당해도 법의 보호 대상이 되지 못하곤 했다. 이 법은 42년이나 지난 1995년, '강간과 추행의 죄'로 개정되며 비로소 '정조'의 문제가 아닌, '성적 자기결정권'의 문제가 되었고 '부녀'로 한정된 피해자가 '사람'으로 확대됐다. 이때도 물풀은 존재했을 것이다. 허나 더 많은 이들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그 명확한 방향 앞에서 물풀은 그저 가녀리게 나부낄 뿐이다. 그리고 지금, 또 한 번의 전진을 앞두고 있다. 물풀이 될 것인가, 전진하는 배에 올라탈 것인가.

이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