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망하는 줄 모르고... '비 갠 후 하늘색' 도자기 빚으라 어명

입력
2023.05.20 10:00
<116> 허난성 ⑤위저우 균관요지박물관과 션허우고진

‘천청색이 비를 기다리듯, 나 또한 당신을 기다려요(天青色等煙雨, 而我在等你)’. 중국 가수 저우제룬이 부른 ‘청화자(青花瓷)’의 노랫말이다. 2008년 당시 최고 인기였다. 천청색이란 무슨 색깔인가? 밋밋한 흙을 빚어 유약을 바르고 고온의 가마를 거친 청화백자다. 파란 하늘이 연상된다. 그런데 왜 비를 기다린다고 했을까? ‘당신은 가마 속 천년의 비밀을 감추고 있구나(你隱藏在窯燒里千年的祕密)’라고 한다. 도자기 하면 곧 송나라다. 도자기 유적이 170여 곳이나 된다. 약 75%가 송나라 시대 가마터다. 중원의 도자기 도시 위저우(禹州)로 간다.


송나라 오대명요 가운데 하나인 균요(鈞窯)

기원전부터 양적(陽翟)이라 불렸다. 균주(鈞州)라고도 했다. ‘균’은 금속의 무게를 재는 단위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지명이 변했다. 황제 이름이 주익균(朱翊鈞)이니 어쩔 수 없었다. 우가 물을 다스렸다는 대우치수(大禹治水) 신화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하나라 건국신화를 기록한 ‘사기’ 덕분이다. 한족의 발원인 화하제일도(華夏第一都)라는 자부심이다.

송나라 시대의 오대명요가 있다. 여(汝), 관(官), 가(哥), 균(鈞), 정(定)이다. 지명이나 상징 뒤에 요(窯)를 붙인다. 균요(鈞窯)는 위저우 일대 가마터다. 시내에 위치한 균관요지박물관(鈞官窯址博物館)을 찾아간다. 도자기박물관이기도 하다. 전시실은 6개 부문으로 나뉜다. 위저우 역사 인물과 함께 청동기, 토기, 도자기를 전시한다.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한비가 손을 펼쳐 인사한다. 진나라의 통일 기반을 제공한 여불위도 있다. 안양 출신인데 위저우에서 장사를 시작해 성공을 거뒀다. 출신지에 다툼이 있지만 한나라 개국공신인 장량도 있다. 공자행교도(孔子行教圖)로 유명한 당나라 화가 오도자도 등장한다. 항저우에서 태어났지만 위저우에서 작위를 받고 사망한 당나라 서화가이며 정치가인 저수량도 소개한다. 당나라 시대 의사이자 약사인 손사막도 있다.

토기와 청동기도 전시하고 있다. 기원전 5,000년 역사의 앙소문화(仰韶文化) 시대 토기가 있다. 붉은 빛깔 감도는 홍도완(紅陶碗)이다. 검은 광택을 풍기는 용산문화(龍山文化) 시대 흑도배(黑陶杯)도 있다. 기원전 2,000년 전 유물이다. 둘 다 신석기 유물이다. 청동기도 전시하고 있다. 기원전 1,122년경 건국한 주나라 초기의 술잔인 동작(銅爵)이 보인다. 박물관 어딜 가도 하나씩은 전시한다.

송나라부터 금나라와 원나라까지 도자기가 발달했다는 안내문이 있다. 위저우 균요 도자기에 대한 설명이다. 북방의 주류였고 영향력이나 생산 규모가 엄청 컸다. 중국 도자기 산업의 메카인 징더전은 명나라 시대에 이르러 세계의 주목을 받는다. 송나라 다섯 곳과 징더전을 묶어 6대 도자기 생산지다. 오대송요 중 가요(哥窯)와 징더전만 남방에 위치한다. 나머지 네 곳은 모두 북방이다.

북송 시대 천람유반(天藍釉盤)이 있다. 하늘 색깔이 바닥을 수놓고 구름인 듯 하얀색이 남은 접시다. 온통 하늘색만 가득한 사발인 천람유완(天藍釉碗)도 진열돼 있다. 가장자리에 달빛이 내려앉은 듯한 접시인 월백유절변반(月白釉折邊盤)이 있다. 월백은 아주 옅은 남색으로 얼핏 보면 하얗다. 화분 받침대 두 개가 나란히 있다. 연화식분탁(蓮花式盆託)과 계화식분탁(葵花式盆託)이다. 가장자리가 연꽃과 해바라기 모양이다. 백색 바탕인데 하늘색이 살짝 발라져 있다. 균요 도자기에 담긴 하늘빛이 볼수록 담백하게 느껴진다.

어용관균(御用官鈞) 전시실의 그림이 낯익다. 궁전 지붕 위로 학이 자유로이 비행하는 장면이다. 베이징 고궁박물원에 근무하는 학자이자 작가인 주융의 저서 ‘고궁의 옛 물건(故宮的古物之美)’에서 봤다. 유물만큼 아름다운 필체와 깊은 감성으로 쓴 책이다. 번역본(나무발전소)이 출간돼 있다. 제14장 ‘비 갠 후 푸른 하늘(雨過天晴)’에 나오는 서학도(瑞鶴圖)다. 북송의 마지막 황제인 휘종의 작품이다. 황제는 비 갠 후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하늘의 빛깔을 그렸다. 그림을 그린 후 그 빛깔 그대로 도자기를 만들라는 어명을 내렸다.

도공이 어렵사리 유약을 만들고 도자기를 구웠다. 오대명요 중 여요다. 균요와 아주 가깝다. 서쪽으로 약 50km 떨어진 여주(汝州) 가마터다. 영롱한 빛깔로 빚어 실물로 보면 동공이 맑아지는 느낌이다. 여요 도자기는 많이 남지 않았다. 베이징 고궁에도 한 점 밖에 없다. 제대로 보려면 타이베이 고궁박물원에 가면 된다. 여요 코너가 있다. 접시 바닥에 병(丙) 자를 새긴 청자엽(青瓷碟)이 있다. 붓 씻는 그릇인 청자세(青瓷洗)도 있다. 보이지 않지만 바닥에 봉화(奉華)가 새겨져 있다 한다. 남송 고종의 류귀비가 애지중지하던 도자기 표시다. 목이 길고 몸통이 둥근 청자첨병(青瓷瞻瓶)도 있다. 주막에서 막걸리 마실 때 쓰던 병과 비슷한데 국보급 유물이다.


균요에서 출토된 파편도 있다. 도공이 도자기를 만드는 과정에서 많은 잔해가 발생한다. 황제가 궁전에서 도자기를 품평하는 모형이 있다. 황실의 주문을 맞추려면 여분의 도자기를 가마에 굽게 된다. 납품 후 남는 도자기나 불량품은 함부로 유통하지 못한다. 모두 깨트리게 된다. 진품은 황제나 고관대작의 생활용품이었다가 소장품으로 변해갔다. 지금은 박물관이 대부분 소장하게 된다. 오랫동안 매장됐다가 세상에 드러난 파편이다. 천년의 비밀이라도 간직하고 있는 듯하다. 하나하나 세밀히 바라본다.

당대 예술품도 전시하고 있다. 세련된 모양과 현란한 빛깔로 무장한 도자기다. 고대 유물의 이름은 유약과 용도로 정해지는게 일반적인데, 당대 도자기는 갤러리의 예술품처럼 제목을 지었다. 용과 봉황이 등장해 상서로운 일을 경축하는 용봉정양(龍鳳呈祥), 양 세 마리의 머리를 새겨 새해를 축하하는 삼양개태(三陽開泰)가 있다. 오후송복(五猴送福)은 가운데 원숭이 다섯 마리에 복 자를 붙여 관록과 재물을 누리라는 뜻으로 지었다. 동물을 이끌고 오니 좋은 뜻이 만들어진다.


모양으로 이름을 정하기도 한다. 윗부분 구멍 뚫은 모양이 부처의 좌상이라 불연(佛緣)이다. 중생이 부처와 맺은 인연을 조각했으니 신자라면 합장할 일이다. 그림이나 글자를 새기거나 볼록하고 오목하게 만들기는 쉽다. 투각은 보기에도 그냥 현대적 느낌이다. 오밀조밀하게 깎은 성시인상(城市印象)도 있다. 대도시의 빌딩 숲을 보여준다. 가까이 보니 솜씨가 탁월하다. 고대 유물을 보고 예술로 승화된 도자기와 만나니 느낌이 색다르다.

균요를 대표하는 도자기 마을 션허우고진(神垕古鎮)

도자기 마을이 그려져 있다. 균요를 대표하는 션허우고진(神垕古鎮)이다. 당나라부터 이름을 떨쳤고 송나라와 원나라를 거쳐 명나라에 이르러 번성했다. 위저우 부근에는 옛 가마터 유적지가 널리 분포돼 있다. 휘황찬란한 역사를 보려면 꼭 가보라는 이야기다. 당지무괴(當之無愧) 균자지도(鈞瓷之都)라 한다. 위저우 도자기의 수도라 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말이다. 서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

터미널에서 버스를 탔다. 요금은 5위안(약 960원)이다. 시 외곽으로 다니는 버스다. 출발하자마자 풀풀한 시골 냄새로 금세 범벅이 된다. 사람 사는 기분을 느끼며 여행이 시작된다.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자주 흔들거린다. 현지인은 불편할지 몰라도 평소와 다른 맛이라 오히려 좋다. 사투리로 시끄럽게 떠들어도 정겨운 소란이다. 귀 쫑긋하며 버스에 몸을 맡긴다. 오후 햇살과 함께 찾아오는 더위는 창문으로 스미는 풋풋한 바람이 씻어준다. 1시간이나 걸렸지만 기분 좋은 길이다.

버스에서 내려 고진 가는 길을 물었다. 한 아주머니가 ‘저기’로 가다 보면 표지판이 보인다고 한다. 밉지 않은 손가락질을 따라간다. 작은 마을이라 방향만 찾으면 금방이다. 길거리에 조각상이 있다. 도자기 만드는 과정을 보여주는 도공들의 환영 인사다. 6명의 도공이 자기가 맡은 단계를 시연하는 중이다. 중간에 벽돌로 쌓은 아치형 문이 있다. 가마 입구다. 가마에 들어가기 전과 후로 나눠 도공의 손에 들린 도자기가 서로 같을 수 없다.


큰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트니 내리막길이다. 끝까지 가니 담장이 나온다. 입구의 좁은 문으로 들어서니 다시 담장이 나온다. 이중으로 쌓여 있어 신기하다. 10m 정도 길이의 아치형 다리를 건너니 다시 문이 나타난다. 북송 시대 황실 도자기를 만들던 마을이다. 신(神)도 신비로운 뉘앙스를 풍기지만 후(垕)도 예사롭지 않다. 후(后)와 토(土)가 합체된 글자로, 두텁다는 후(厚)와 동의어다. 후는 군주를 뜻하니 마을 이름으로 제격이다.

골목을 정비하느라 공사가 많다. 좁은 편인데 사람이 많아 어수선하다. 골목은 활처럼 휘어져 있다. 중간 즈음에 사당이 하나 있다. 민가가 대체로 소박한데 비해 유약 바른 유리 지붕을 세워 유난히 돋보인다. 백령옹묘(伯靈翁廟)다. 백령은 전국시대 걸출한 군사 전략가 손빈의 자(字)다. 민간에서 공예의 장인으로 숭배한다. 요신묘(窯神廟)라 부른다. 관광지로 활성화되지 않아 일찍 대문을 닫았다. 안내문에 따르면 손빈을 중심으로 양쪽에 토지와 불의 신이 보좌하고 있다. 예토화(藝土火)가 어울린 도자기 마을의 사당이다.

골목은 약 200m에 이른다. 민가가 촘촘하게 붙어 있다. 가끔 조금 큰 저택도 보인다. 골동품이나 공예품 가게로 바뀐 민가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도자기를 파는 가게도 많다. 집안에 있는 돈꿰미의 돈보다 도자기 한 조각이 더 비싸다던 마을이다. 대문이 열려있는 저택이 있다. 처마 밑에 홍등이 걸렸고 방이 안쪽까지 꽤 많다. 도자기로 부를 형성한 상인 저택이다. 백년노균(百年盧鈞) 편액이 쪽문 위에 붙어 있다.

안쪽으로 작업실이 있다. 유약을 채 바르지 않은 도자기가 바닥에 놓여 있다. 가마로 들어갈 때를 기다린다. 파편도 잔뜩 많다. 전시판매장은 훨씬 깔끔하다. 여러 형태와 색깔로 무장한 도자기가 반짝거리며 나열돼 있다. 가격표를 보니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상품 브랜드도 있는데 주인의 성을 따서 노균요(盧鈞窯)다. 우리 돈으로 500만 원부터 3,000만 원까지 다양하다. 도자기 전문가가 아니니 비싸다고 하기도 어렵다.

명나라 초기에 정착한 묘씨 집안의 사당이 있다. 앞길을 중장비가 고르고 있는 중이다. 션허우고진에서 25대에 걸쳐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과거를 통과한 인재도 여러 명 배출했다. 대청을 지나니 높은 담장이 나온다. 양쪽으로 효도하라는 효(孝)와 공경하라는 제(悌)가 적혀 있다. 청나라 시대 건축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니 봉건시대의 어조다. 가운데에 뿌리 근(根)과 사방으로 날아다니는 박쥐를 조각했다. 집안의 뿌리가 깊어져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왕성해지라는 당부다. 재물과 수명에 대한 염원이기도 하다.


여느 마을과 달리 색다른 광경이 있다. 도자기가 박혀 있는 담장이다. 벽돌과 시멘트로 만든 담장에 겹겹이 도자기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완성되지 못한 도자기의 운명이다. 흙으로 쌓은 민가 담장도 예술품 같은 매무새를 보이고 있다. 균요는 십요구부성(十窯九不成)이라 했다. 가마에 들어가도 열에 아홉은 제대로 성공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사람의 손때로 사랑을 받지 못하고 버림받아야 할 신세인 셈이다. 이제 황실도 없으니 백성의 바람을 막는 담장이 되어도 무방하리라. 건축비 줄이는데 쓰면 또 어떻겠는가.

사당 지붕을 지나 하늘을 바라다본다. 말을 탄 선인(仙人)과 신수(神獸)의 시선을 따라간다. 천년 전 황제는 서화에 미쳐 창공을 날아다니는 학을 그렸다. 마음에 드는 하늘색 찾느라 정치나 국방은 안중에 없었다. 비를 기다렸으니 술잔도 넘쳤다. 비 갠 후 구름 사이를 뚫고 나온 색깔이 최상이었다. 그림을 그렸고 도자기가 창조됐다. 황제는 금나라 군대의 포로가 돼 이국만리에서 객사했다. 무덤도 없다. 구름 사이로 노을이 스며드는 도자기 마을의 늦은 오후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고 있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