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망신·굴욕·좌절 없었다면...” 콩쿠르 휩쓴 피아니스트의 고백

젊은 피아니스트의 인터뷰는 담대했지만, 말뿐이었다. 그의 마음과 머릿속은 요동치는 중이었다. 국제 콩쿠르에서 연달아 입상하며 ‘콩쿠르 스타’로 얼굴을 알린 그였다. 경력의 정점에 오른 찰나, 얄궂게도 곤두박질쳤다. 피아니스트 백혜선(58), 그는 스물네 살이던 1989년 미국 내 메이저 콩쿠르인 윌리엄 카펠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차지한 후 연달아 영국 리즈 콩쿠르에서 5위(1990),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4위(1991)에 올랐다. 그처럼 국제 콩쿠르를 휩쓸다시피 한 한국인 피아니스트가 당시엔 없었다. 1993년 미국 최고 권위 콩쿠르인 반 클라이번에서도 당연히 그에게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됐다. 그런데 본선 1차 탈락이라니. 예상치 못한 결과에 가장 당혹스러워한 것은 그 자신.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PBS(Public Broadcasting Service)가 그를 강력한 상위권 입상 후보로 꼽고 이미 카메라를 붙인 상황이었다. PD는 때를 놓치지 않았다. “How do you feel?” 사태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아 멍한 그에게 탈락한 심경이 어떠냐니. 그래도 그는 잠시 시간을 달라고 해 숨을 고른 뒤 담담하게 인터뷰에 응한 것이다. 인생을 좌우하지 않긴,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집으로 달려가 펑펑 울었다. 한 달은 누워 있다시피 지냈다. 피아노 앞에 그렇게 오래 앉지 않은 건 처음이었다. 그만둘 결심도 했다. 진짜로 다른 생업을 구했다. 장거리 전화 서비스 회사 상담직원. 운명은 다른 길에 있던 것인가. 얼마 되지 않아 영업 실적 톱을 찍었다. 불과 입사 두 달 만에 승진할 기회가 왔다. ‘아르바이트로 식당에서 일할 때도 전직 제안을 받더니, 나는 뭘 하든 빠지는 게 없구나.’ 그는 심정적으로 이미 피아노를 포기했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을까. 개망신, 굴욕, 눈물이 난무한 ‘백혜선의 실패연대기 피아노협주곡 1번’ 1악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피아니스트 백혜선(뉴잉글랜드 음악원 교수)의 평생 스승은 피아니스트 러셀 셔먼ㆍ변화경 부부다. 한국에서 첫 스승으로 만난 추승옥 전 영남대 교수를 따라 미국 보스턴으로 유학을 떠난 게 계기다. 추 전 교수는 한국으로 돌아가고, 미국에 홀로 남았다. 그때 뉴잉글랜드 음악원에서 변 교수를 만났고 후에 그의 남편 셔먼 교수를 사사하게 된 거다. 그게 열다섯 살 때 일이다. 그땐 그도 두 사람이 인생의 스승이 될 줄은 몰랐다. 심지어 셔먼 교수 앞에서 처음 피아노를 쳤을 때 속으로 이렇게 선언까지 했다. ‘셔먼 선생님 앞에서 다시는 피아노를 치지 않을 거야!’ -어땠기에 그런 결심까지 했던 건가요. “셔먼 선생님의 마스터 클래스 시간이었어요. 청강생 70명 정도가 함께 하는 공개 레슨이에요. 그런데 선생님이 제가 친 베토벤의 (소나타) 발트슈타인을 듣곤 제가 치는 흉내를 내면서 ‘너는 이게 손가락 운동을 하는 곡이라고 생각해? 너는 지금 손가락만 움직이고 있는데?’라면서 웃으시는 거예요.”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는 걸까요. “예를 들면 ‘이 대목은 마치 심장 박동처럼 긴장감을 줘야 한다, 또 이곳에선 왜 숨을 안 쉬느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나중에야 이해했지만 피아노 연주는 마치 일인다역을 하는 것처럼 감정을 실어 연기를 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그때는 그게 무슨 뜻인지 하나도 못 알아들었죠. 하하. 그러니까 저는 더 얼어붙고요. 게다가 엄청 창피했죠. 작은 홀 하나가 가득 찰 정도로 청강생이 많았으니까.” -어땠나요. “그때는 속으로 ‘선생님 정말 나쁘다. 나를 사람들 앞에서 망신 주려고 그러시나 봐. 이 곡은 다시는 안 쳐야지. 아니, 선생님 앞에서는 아예 연주를 안 할 거야. 나는 바보야. 변화경 선생님은 왜 나를 저 선생님한테 공개 레슨 받게 했을까’ 하면서 엉엉 울었죠. 게다가 사춘기였잖아요.” -그렇게 굴욕감을 느낀 건 처음이었나 봐요. “한국에서 예원학교를 다닐 때까지 저는 고비 없이 쭉쭉 잘 넘어가는 학생이었어요. 콩쿠르에 나가서 2등 밑으로는 떨어져본 적도 없고요. 피아노로는 어딜 가나 인정받는 학생이었죠.” 만 네 살 때부터 피아노를 쳤다. 재능도 타고났겠지만, 매일 연습의 끈을 놓지 않는 성실한 수련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땐 콩쿠르를 준비하면서 하루 여덟 시간씩 연습하다 나중엔 틀리지 않고 매일 백 번씩 참가곡을 치는 수준에 이르렀다.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가 말이다. -셔먼 선생님의 그런 지적이 언제 이해되던가요. “그때 저는 어렸지만 기교가 있었어요. 그런데 발트슈타인은 기교만 가지고는 절대 제대로 칠 수 없는 곡이에요. 소리 자체가 꽉 차 있어야 하죠. 같은 대본이라도 어떤 배우가 말하느냐에 따라 감정이 다르게 전달되잖아요? 피아노도 마찬가지예요.” -망신과 굴욕의 시간은 언제 극복됐나요. “극복은 무슨요. 평생 선생님 앞에선 나락으로 떨어졌다가 좀 인정해주시면 올라가는, 감정 롤러코스터를 반복하죠. 하하. ‘그럴수록 더 열심히 해야지’ ‘이번에 이렇게 하면 선생님이 과연 인정해주실까’ 이런 과정의 연속이었어요. 그런데 돌이켜보면, 두 분이 제 자존감을 다져준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건 곧 정신력이죠.” 그에겐 성공도 일찍 찾아왔다. -스물네 살 때 미국 윌리엄 카펠 콩쿠르에서 우승을 했죠. 처음 나간 국제 콩쿠르에서 1위를 한 건데 어땠나요. “나한테 웬 복권이 (당첨돼서) 떨어진 건가. 이런 걸 보고 기적이라고 그러는구나 싶었어요. 전혀 기대하지 않고 나갔으니까요.” -그 즈음 연속해서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했죠. 1990년엔 결선에 진출하는 여섯 명 안에만 들어도 대단한 영예로 여겨지는 리즈 콩쿠르에서 5위, 이듬해엔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4위를 했어요. “하하. 그 시기에는요, 제가 보스턴 거리를 지나가기만 해도 (쑥스러운 미소) 애들이 ‘야, 백혜선 왔어, 백혜선’ 그랬어요. 한국 유학생들이 아니라 미국 학생들이요. 퀸 엘리자베스에 나가기 전에는 한국 호암아트홀에서 독주회를 했는데 매진이었죠. 지금이야 손열음, 조성진, 임윤찬 같은 연주자들이 있지만, 그때는 여러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한 사람이 거의 없었거든요.” 성공가도에 상상도 못 해본 일이 벌어졌다. -3년간 매해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을 해 정점에 오르는 듯했는데 1993년에 미끄러져버렸어요.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가 끝나면 특집 다큐멘터리가 나갈 계획이었어요. PBS에서 준비하고 있었죠. 당시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채널은 그거 하나였어요. 콩쿠르가 시작하자마자 강력한 입상 후보 서너 명에게는 카메라가 따라다녔고 저도 그중 하나였어요. 그런데 본선 1차에서 탈락한 거예요.” -어떠셨나요. “발표를 하는데 제 이름이 안 불리는 거예요. 너무 기가 막혀서 멍하더라고요. 넋을 놓은 사람처럼 가만히 있었죠. 그런데 그때 저를 따라다니던 프로듀서가 그러는 거예요. 인터뷰를 해야 한다고. 스물여덟 살이니까 어릴 때잖아요. 거절도 못 하고 알았다고 그랬죠. 스튜디오 같은 데에 갔는데 소감을 묻더라고요. 거기다 대고 날 왜 떨어뜨렸냐고 할 수도 없고…” 그는 당시 이렇게 말했다고 기억했다. “콩쿠르에 나가면, 붙기도 하고 떨어지기도 하는 거죠. 왜 탈락했는지 모르겠지만, 심사위원들이 생각하기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지만 인생은 계속되는 거잖아요. 여기서 떨어졌지만, 이 결과가 내 삶을 크게 좌우하진 않을 거예요.” -말을 잘했네요. “그래 놓고는 집에 가서 펑펑 울었죠. 하필 그 인터뷰가 다큐멘터리에 그대로 다 나온 거예요. 백혜선이라는 피아니스트가 반 클라이번에서 떨어졌다고 미국 전역에 방송이 된 거죠. 윌리엄 카펠에서 우승한 애가 반 클라이번에서는 본선 1차에 탈락했다고. 어딜 가나 ‘너 PBS에서 봤어. 너무 아깝게 떨어져서 안 됐어’ 이러는 거예요. 아니, 왜 그 프로를 안 본 사람이 없어. 하하. 그러니 충격이 몇 달을 가더라고요.” 기가 막히다는 듯 또 한 번 크게 웃더니 그가 말했다. “그 인터뷰가 유튜브에도 있더라고요. 작년에 제자들이 저한테 그걸 보여주면서 ‘선생님, 이거 재미있게 봤어요’ 하는 거예요. 나는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부르르 끓어오르는 게 있는데. 어떻게 이건 안 봤으면 좋겠다 싶은 거만 골라서 보는지. 하하.” -스물여덟 살에 커다란 실패가 찾아온 거네요. “한 달은 누워서 지낸 듯해요. 몸을 제대로 간수조차 못 하겠더라고요. 완전히 무기력한 상태였어요.” -피아노도 놓아버렸나요. “네, 안 쳤죠. 반 클라이번 콩쿠르가 5, 6월쯤 열렸거든요. 그래서 그해 여름은 어떻게 지냈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이제 뭐하지’ 싶었죠.” -피아노를 잠시 쉰 게 아니라 아예 그만둘 생각이었나요. “8월쯤 됐을 때 친구를 만났는데, 전화회사에 다닌다기에 나도 좀 거기에 소개해달라고 했죠.” -왜 그렇게까지 했나요. “피아니스트는 콩쿠르에 나가지 않으면 먹고살 길이 없어요. 콩쿠르에 출전해서 입상하면 부상으로 음악회 기회를 주거든요. 매니지먼트 회사에도 들어갈 수 있고요. 그럼 개런티를 받고 연주회를 다니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됐으니 앞으로 뭘 해서 먹고살지 싶더라고요. 한국을 일찍 떠나왔으니 이렇다 할 인맥도 없어서 한국으로 갈 수도 없고요. 차라리 직장을 구하자고 마음먹고 그 전화회사에 나간 거예요.” 그 회사는 미국 장거리 전화회사인 MCI다. 당시 업계 1위였던 AT&T의 경쟁사였다. -맡은 일이 뭐였나요. “전화 영업이었어요. 가입 상담 전화가 오면 홍보하는 일이었죠. 그런데 내가 설명을 하면 열이면 열 명 모두 MCI에 가입하겠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당시 매니저가 ‘네가 이 층에 있는 상담원을 통틀어서 톱이다, 이 정도면 매니저급이야’라면서 칭찬을 했죠.” 매니저 승진을 앞둔 그에게 변화경 교수가 연락해왔다. “전화회사가 웬 말이냐. 다 그만두고 피아노 연습만 해. 차이콥스키 콩쿠르 안 나갈 거야?”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꿈의 무대잖아요. “그때까지 피아노는 치지도 않고 전화회사만 다니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변 선생님 손에 끌려가다시피 해서 신청했죠. 이듬해 1월이 신청 마감이었거든요.” -차이콥스키 콩쿠르를 준비하는 마음이 어땠나요. “선생님이 하도 하라고 하니 준비하긴 하는데, 제 안에선 계속 ‘1차에서 떨어지면 어떡해’ 이런 걱정을 하고 있는 거예요. 피아노만 치면 눈물이 나고요. 이러다 1차 예선에서 떨어질 수도 있겠다는 공포감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이 밀려왔어요. 반 클라이번 때가 생각나면서 이제는 내게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차이콥스키 콩쿠르는 러시아의 텃세가 만만찮은 무대다. 콧대 높은 러시아 관객과 심사위원, 심지어 오케스트라도 그가 넘어야 할 장벽이었다. 게다가 그는 1990년대에 보기도 드문 동양인, 그것도 한국 여성 피아니스트였다. 당시 참가자 중엔 니콜라이 루간스키라는 러시아 피아노 스타도 있었다. -콩쿠르 과정은 어떻게 견뎠나요. “기죽지 말자고 다짐에 다짐을 했죠. 마음을 움직이는 연주를 하자고요. 그런데 1차 예선을 지나 2차 본선이 끝날 무렵에 관중의 태도가 달라졌어요. 제게 꽃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죠. 거기다 운도 따랐어요. 당시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10회째여서 과거 1, 2위 수상자들이 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거예요. 그래서 여느 때와는 달리 심사위원 12명 중에 러시아 사람은 3명뿐이었죠. 심지어 러시안 중 1명은 과거 제가 뉴잉글랜드 음악원에 다닐 때 저희 학교를 방문해서 제가 피아노 치는 걸 보고 칭찬을 했던 사람이었죠. 저를 기억하고 있더라고요. 물론 그도 러시안이니 (우승자로) 루간스키를 뽑겠지만, 적어도 저한테 해코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3차 결선에 올랐다. 진출자 8명 중 마지막 순서였다. 직전 연주자는 일본인이었다. 관객의 박수는 박하고 박했다. 스승 변화경의 조언이 떠올랐다. “싫다는 애를 잡아다가 내보내서 걱정이 되셨는지 결선 때부터는 변 선생님이 오셔서 함께 지냈어요. 제게 힘을 많이 불어넣어 주셨죠. 특히 솔로 무대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기교를 보여주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마음에 닿는 연주를 하겠다는 자세로 치라고, 음악으로 호소해 관중과 오케스트라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했나요. “호소 정도가 아니라 제 몸에 불을 지르면서 친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관객이 저를 불쌍하다고 느꼈을지도 몰라요. 온몸이 (땀으로) 다 젖었죠. 연주가 흐르면서 오케스트라도 제 피아노 소리에 점점 더 집중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첫 곡을 마치고 무대 뒤로 왔는데 박수 소리가 끊이지 않는 거예요. 러시안 특유의 ‘짝짝짝, 짝짝짝’ 하는 박수가 계속 이어졌죠. 러시안 피아니스트가 아니면 받지 못하는 박수였죠. 그 소리를 듣는데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나도 이 박수를 받을 수가 있구나.’” 두 번째 곡을 치러 무대로 다시 나가야 하는데 그는 시간을 끌었다. 관객은 그가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박수를 칠 기세였다. 나가자는 지휘자에게 “잠시만”이라고 말한 뒤 물을 좀 더 마셨다. 관객의 화답을 좀 더 만끽하고 싶었던 거다. 무대에 다시 선 그에게 관중은 환호까지 내질렀다. 두 번째 곡은 이 콩쿠르의 지정곡, 그 유명한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이었다. -첫 번째 곡을 연주할 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겠는데요. “오케스트라 단원들도 활로 박수를 쳐주는 거예요. 보통 그런 법이 없거든요. 차이콥스키 피아노협주곡 1번이 ‘빰빰빰빰 빰!’ 이렇게 시작하잖아요? 오케스트라도 열정을 다해서 연주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지금껏 그렇게 감동적인 무대는 드물어요. 3악장까지 마치고 나니까 관객이 기립박수를 쳤어요. 환호와 함께요. 저한테 사인을 요청하는 러시안도 있었죠. '나한텐 네가 1위다’라고 말해주고 간 사람도 있고요.” 당시 심사위원들은 1위를 뽑지 않았다. 2위는 예상대로 루간스키였다. 그리고 3위로 그의 이름이 불렸다. -반 클라이번 때와 비교하면 뭐가 달랐을까요. “태도죠. 생각해보면, 반 클라이번 콩쿠르 때는 처음부터 ‘내가 백혜선이야’ 하는 게 있었죠. 동양인 피아니스트 중에 저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연주자는 없었거든요. 자만했던 거죠. 연주곡들도 과거에 너무 많이 쳐서 이미 잘 안다고 생각하는 곡들이었고요. 내 온 정성을 불살라서 친다기보다 ‘이 곡들은 언제든 치라고 해도 칠 수 있지’ 하는 태도였어요.” -차이콥스키 콩쿠르 때는 절실했나요. “그렇죠. 그렇게 준비해본 적이 없었어요. 비장하기도 했죠. 후회 없이 하자는 각오로 했어요. 물론 만반의 준비를 해도 떨어질 수 있다고 마음을 다졌지만요.”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한국 국적의 연주자가 입상을 한 건 사상 최초였다. 그것도 ‘1위 없는 3위’. ‘콩쿠르 여제 백혜선’이라는 인지도를 만든 계기다. -차이콥스키 콩쿠르가 끝난 뒤 같은 해 서울대가 교수로 기용했어요. 최연소 교수였다고요. “만 스물아홉 살이었으니까요. 주위에서 다 그랬죠. ‘너는 이제 인생에 걱정이 없겠다. 어떻게 다 가졌니’. 그때 제가 ‘성공시대’라는 다큐멘터리에도 나갔다니까요. 저보다 먼저 조수미씨가 출연했고요. ‘성공시대’에 나가고 나니까 제 얼굴이 더 알려진 거예요. 가는 곳마다 사인해달라고 하고요.” -그런데 10년 만에 교수직을 사임했죠. “서울대에 재직하는 10년 동안 3주에 한 번꼴로 연주하러 해외로 나갔어요. 한국에선 숨이 잘 안 쉬어지더라고요. 외국에 연주하러 나갈 때마다 학교 본부의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그나마도 학교 측에서 저를 많이 배려해준 거였죠. 사실 처음부터 ‘내 옷이 아니네’ 싶었어요. 샤워하면서 맨날 울 정도였죠. 난 연주자니까, 연주가 곧 논문이고 연구고 배움이잖아요. 갇혀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시기 아들, 딸이 잇달아 태어나지 않았다면, 아마 5년 만에 그만뒀을 거예요.”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는 안정적인 국립대 교수 자리를 버리고 미국으로 떠나 ‘광야의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택했다. 그건 어쩌면 기꺼이 또 닥칠지 모르는 실패의 순간을 맞이할 준비를 한 것일 테다. 그것도 나이 마흔에. -부군과 헤어지고 혼자 자녀 둘과 떠난 건데 두렵진 않았나요. “너무 순진해서 뭘 몰랐던 거죠. 앞으로 어떤 힘든 일이 닥칠지 가늠조차 못하고요. 연주자로 돈을 모으고, 틈틈이 재테크도 하면 아이 둘 키우며 사는 데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죠. 한 3, 4년은 괜찮았어요. 그런데 제가 투자하는 것마다 안 되는 거예요. 아이들은 커가고요.” -그럼 생계가 점점 어려워졌을 텐데요. “이러다가 진짜 굶어 죽는 거 아닌가 싶었죠. 하하. ‘다시 식당 종업원을 해야 하나, 장거리 전화회사도 이젠 없어졌는데 어디에 취직해야 하나’ 생각도 했어요. 프리랜서 연주자라는 게, 한창 연주 제의가 들어올 땐 너무 바빠서 정신없다가 한 석 달간 한 건도 안 들어올 때도 있거든요. 그래도 하나님께서 계시는구나 싶었던 게 아이 둘 다 공립학교에 들어가서 겨우 가르칠 수 있었어요.” 자녀 둘은 모두 하버드대에 입학했다. -미지의 실패, 그러니까 아직 오지 않은 실패에 대해 생각해본 적도 있나요. “나이가 들면서 무대 기회가 점점 적어질 거라는 생각을 해요. 이미 내 손가락도 젊었을 때처럼 자유자재로 된다는 느낌이 적죠. 그러니 노력을 훨씬 더 많이 해야 해요. 그런데 나이 들고 많은 경험을 한 나는, 사람들 마음속에 무언가 여운이 남는 연주를 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알죠.” 그가 1월에 낸 책 ‘나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입니다’를 보자마자 그를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실패를 대놓고 인정하고 아예 책 제목으로까지 삼은 이 피아노의 대가를 ‘실패연대기’가 안 만나면 누가 만나겠나. 이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간, 마음의 흐름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실패의 경험이 연주에도 녹아들까요. “연주자뿐 아니라 예술가 중 오늘 작품에 자신 있게 만족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 거예요. 매일매일이 좌절과 실패의 연속이지만, 그걸 극복하고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거죠. 오늘의 실패가 있으니까 그걸 경험으로 더 성숙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모두는 ‘좌절의 스페셜리스트’예요.” -지금까지 경험한 실패들로 실패를 정의해본다면 뭘까요. “실패란 꼭 경험해봐야 하는 것, 그리고 나를 한 단계 넘어서게 하는 디딤돌이다. 게다가 예술가의 실패는 단순한 실패가 아니라 경험의 여정이거든요.” -실패를 모를 때의 백혜선과 경험한 이후의 백혜선은 다르던가요. “굉장히 달라요. 이제는 산전수전 다 겪어서 피아노라는 목소리에도 그 다양한 감정이 담기죠. 비로소 음악으로 말을 할 줄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젊었을 땐 어떻게 하면 완벽한 연주자가 될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제는 마음에 가닿는 연주를 하는 사람이란 말을 듣고 싶죠. 그러니 내게 연주가 더 뜻깊어졌어요.” -인생의 크고 작은 실패가 알려준 삶의 도는 뭔가요. 그는 다음 달 5일 제주 서귀포예술의전당, 11일엔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다. 예술의전당 전관 개관 3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음악회다. 좌절과 굴욕, 실패의 가치를 아는 피아니스트여서, 그의 연주는 분명 우리 인생을 닮았을 것이다.

"송혜교 탈진할 뻔"한 '더 글로리' 엄마의 폭력

부적응. 넷플릭스 시리즈 '더 글로리'에서 동은의 엄마 정미희(박지아)는 이런 사유가 적힌 딸의 자퇴서에 서명한다. 동은의 엄마가 딸의 학교폭력 가해자인 연진 엄마에게서 돈을 받고 한 일이다. 합의금을 손에 쥔 엄마는 딸을 버리고 야반도주한다. "절대 용서 안 할 거야. 내가 당신을 용서 안 하는 이유는 첫 가해자라는 걸 당신은 지금도 모르기 때문이야". 동은은 20여 년이 흘러 다시 만난 엄마에게 이렇게 소리치며 오열한다. 그때 동은의 집은 불타고 있었다.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는 딸의 집에서 혼자 삼겹살을 구워 먹다 딸에 화가 나 불을 지른다. 고기가 뜨거운 불에 지글지글 타는 소리가 집을 에워싸자 동은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한다. 그의 몸엔 머리 모양을 다듬을 때 쓰는 미용전기제품 일명 고데기로 학폭을 당한 상처가 가득했다. 그 고통이 다시 떠오른 것이다. 이 장면을 찍을 때 송혜교는 쓰러질 뻔했다고 한다. 김은숙 작가는 28일 공개된 '더 글로리' 파트2 비하인드 영상에서 "혜교가 집이 불타는 장면 찍고 탈진할 뻔했다더라"고 말했다. 딸의 첫 번째 가해자는 엄마였다. 이 비극을 쓴 이유에 대해 김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피해자분들을 보면 가장 먼저 보호받아야 하는 가정에서 보호받지 못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세상에 태어났을 때 누군가가 부딪히는 첫 번째 세상이 엄마잖아요. 엄마는 (자식의) 첫 번째 어른이고 보호자이고요. 그런데 첫 번째 가해자가 되는 엄마들이 있더라고요. 그 엄마를 동은이 엄마로 그리고 싶었어요." '더 글로리'에서 동은처럼 안타까운 인물은 경란(안소요)이다. 연진(임지연)과 재준(박성훈) 등에 학폭을 당한 경란은 커서도 가해자 옆에서 눈치 보며 그들 주위를 떠나지 못한다. 김 작가는 "모든 (학폭) 피해자가 동은이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며 "가해자에게 벗어나지 못하는 피해자를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경란은 동은을 다시 만나면서 가해자 없는 세상을 처음으로 꿈꾼다. 동은을 학폭으로 무너뜨린 연진, 재준, 이사라(김히어라), 혜정(차주영), 손명오(김건우)는 '동은 오적'으로 불린다. 시청자들이 드라마에 과몰입해 붙인 별명이다. 이 동은오적은 명오 장례식장 장면을 가장 섬뜩한 장면으로 꼽았다. 이곳에서 사라는 "남의 아픔을 기뻐하는 자 사탄일지어다"라고 외치며 친구였던 혜정의 목에 연필을 꽂는다. 김히어라는 "이 장면을 찍은 뒤 너무 기분이 싸해서 '당분간 이런 역할 하지 말자. 이러다 큰일 나겠다'란 말을 동료들과 했다"고 말했다. "어두운 내용을 쓰니 감정이 피폐해지더라"는 게 대본을 쓴 김 작가의 말이다. '더 글로리' 파트2는 공개 첫 주 시청 시간에서 '오징어 게임'(2021)을 넘어섰다. 지난 10일 공개된 '더 글로리' 파트2는 2주 연속 1억 시간 넘게 재생됐다. 지난해 12월 공개된 '더 글로리' 파트1이 첫 주 2,500만여 시간 재생되는 데 그쳤던 것과 비교하면 네 배 이상 폭증했다. 학교폭력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파트1이 공개된 후 한국을 비롯해 말레이시아와 태국 등에서 줄줄이 벌어진 '반(反)학폭' 운동이 세계에서 이 드라마에 대한 관심을 부쩍 높인 여파로 풀이된다. 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보니 '더 글로리' 파트3 혹은 시즌2를 기대하는 시청자도 많아졌다. 드라마 관계자에 따르면, 실제 '더 글로리' 쫑파티에서도 김 작가와 배우들은 파트3에 대한 말을 농담처럼 나눴다고 한다. 이에 대해 넷플릭스 관계자는 이날 "파트3 혹은 시즌2 제작 여부는 미정"이라고 말했다.

"'출판특구' 마포구, 3년 된 출판문화진흥센터를 '일자리센터'로 바꾼다고?"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에 입주한 뒤 센터가 제공하는 도움을 받아 1년도 안 돼 두 권의 책을 낼 수 있었어요. 그런데 이곳 용도가 변경된다는 소식을 듣고 '마포구마저 출판을 버린다고?'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1인 출판사 대표 윤여준씨)" 지난 24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마포출판문화진흥센터(플랫폼P·이하 센터). 경의선 책거리에 접해 있는 이 센터는 '책의 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책으로 둘러싸인 라운지 공간에서는 편집자와 작가, 번역가, 디자이너 등이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센터는 2020년 서울시와 마포구가 출판문화·디자인분야 창업 인큐베이팅 건물을 건립하면서 개관했다. 현재 1인 출판사, 디자인 에이전시 등 출판 관련 50여개 업체가 입주해 있다. 출판 심포지엄과 책과 문화 전시회, 국제 교류 프로그램 등 출판행사도 열리고 첫걸음을 뗀 '병아리 독립 출판인'에게 멘토링을 지원하기도 한다. 월 20만 원대에 사무실을 임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네트워크 구축이 용이해 출판인들의 각광을 받아왔다. 지난 3년간 출판인들의 보금자리로 자리 잡은 플랫폼P를 마포구가 용도 변경을 시도하면서 출판계의 반발을 사고 있다. 개관과 동시에 선발된 1기 입주사들은 올 7월이 지나면 입주기한 만기로 퇴거해야 하는 상황. 새로운 입주사 모집 계획이 논의돼야 하는 시점이지만 마포구는 "현재로서는 결정된 사항이 없다"는 말뿐이다. 지난 연말 센터 운영 위탁 업체와 2년 8개월 계약이 만료된 후 마포구는 새로운 업체 선정을 진행하지 않고 기존 업체와 3개월, 9개월 식으로 쪼개기 계약을 연장하고 있다. 2010년 서울시는 마포구 일대를 '디자인ㆍ출판 특정개발진흥지구'로 지정했고 센터 개관도 그 연장 선상이지만 지난해 구청장이 바뀐 이후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입주자들은 입을 모은다. 한 입주자는 "지난해 박강수 마포구청장이 방문한 뒤 이 공간의 일부를 비우고 스터디카페나 일자리센터를 만들려 한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왔다"고 말했다. 박 구청장은 지난해 도서관 예산을 삭감하면서 사실상 관내 작은도서관 폐관을 추진하려다가 홍역을 치렀던 만큼, 입주자들은 센터에서도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을지 우려하고 있다. 이에 입주자들은 최근 '플랫폼P입주자협의체'를 결성해 플랫폼P의 출판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연대 행동을 예고했다. 출판은 수십 년 동안 마포구, 특히 홍익대 일대에 단단하게 뿌리내린 산업이다. 최신 트렌드와 콘텐츠를 선도하는 작가들이 모여 살고 마포구 내 디자인·출판·인쇄업체의 56%(2020년 기준)가 홍대 인근에 밀집해 있다. 2010년 이후로는 근처 합정, 연남, 망원 지역까지 영역을 넓혀 곳곳에 독립서점이 생기는 등, '출판-서점-독자'가 한데 모인 대표적인 출판 집적지다. 이번 조치에 출판인들의 반발이 거셀 수밖에 없는 이유다. 조현익 입주자협의체회장은 "장기적인 비전을 가지고 쌓아왔던 출판 문화 산업에 대한 로드맵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는 정책과 행정이 진행된다는 것이 문제"라고 말했다. 수십 년 동안 업계 종사자들이 모여 자생적으로 출판 문화를 싹 틔웠고 이를 기반으로 '자치구 특화산업'을 지원하는 정책적 근거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지자체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이를 육성하고 발전시킬 책임을 구청이 방기한다는 것이다. 출판계의 비판도 잇따른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는 "센터는 경의선 책거리와 함께 마포의 특성과 강점을 가장 잘 반영한 출판문화 육성 거점 시설로 주목받아 왔으며 세계적으로도 보기 드문 지자체 소관 출판 문화 육성 시설"이라며 "지자체장이 바뀌었다고 해서 용도 변경을 추진한다는 것은 스스로 경쟁력을 거세하는 탁상행정"이라 비판했다. 김수영 전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장은 "출판·디자인은 다른 지자체가 부러워할 만한 마포구만의 문화적 자산"이라며 "3년밖에 되지 않은 시설의 핵심 정체성을 흔들면서까지 용도 변경을 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다"고 말했다. 마포구는 '일자리 센터'로의 변경 여부에 대해서는 정확히 답하지 않고 있지만 당장 4월부터 센터에는 출판과는 무관한 구청 '청년일자리사업' 참가자 15명이 입주할 예정이다. 올여름이면 이 공간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22개팀이 퇴거하고, 빈 책상만 덩그러니 놓이게 될 터다. 출판인을 육성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기관은 명맥을 이어갈 수 있을까.

문화생활+

문화 기획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