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운산 오늘의 운세] 2024년 4월 27일

36년 예상치 못하게 마음이 답답해진다. 48년 뜻하던 바를 이루게 된다. 60년 순탄한 운이 다가오니 얼굴이 밝아진다. 72년 짜증을 자주 내는 것 때문에 운이 안 따른다. 84년 신호를 잘 지켜 흐뭇해진다. 96년 노력한 것 이상의 결과를 얻는다. 37년 기분이 최고인 날을 보낸다. 49년 질병이 호전되니 기쁘다. 61년 집안에 우환과 질고가 사라진다. 73년 간절히 기다리던 소식을 듣는다. 85년 짜증으로 인해 답답한 일만 생긴다. 97년 어려움을 먼저 알고 나면 성공을 빠르게 이룰 수 있다. 38년 행운이 집안에 가득히 들어온다. 50년 소망하는 일을 성취한다. 62년 망설이지 말고 단호하게 결정을 내린다. 74년 스포츠를 즐기며 기분을 전환한다. 86년 포기하지 않는다면 기회는 다시 찾아온다. 98년 부모님께 효도를 하는 날이다. 39년 재물운이 조금씩 따른다. 51년 진행 중인 일에 따르는 소득이 크지는 않다. 63년 당첨의 재미를 톡톡하게 본다. 75년 소망을 이루며 대길하다. 87년 집안에서 근심과 걱정이 빠져나간다. 99년 금전을 얻은 덕분에 즐거움이 가득하다. 40년 짜증이 나더라도 참아야 한다. 52년 화를 참기만 하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64년 화를 내면 후회가 커진다. 76년 부부 사이에도 예의가 필요한 법이다. 88년 기다리던 소식을 마침내 듣게 된다. 00년 전화 한 통에 마음이 뭉클해진다. 41년 고집을 부리는 까닭에 되는 일이 없다. 53년 따뜻한 햇볕이 집안 가득 들어온다. 65년 기쁜 소식을 휴대전화를 통해 알게 된다. 77년 근심에서 벗어난다. 89년 귀찮은 일이 생기므로 조심한다. 01년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니 기분이 최고다. 42년 금전운이 좋아지지만 마음은 편하지 않다. 54년 스트레칭으로 굳은 근육을 풀도록 한다. 66년 짜증만 내는 날이니 조심한다. 78년 소화가 안 되므로 신경을 써야 한다. 90년 기분이 조금씩 좋아진다. 02년 기다렸던 일이 순조롭게 풀린다. 43년 커다란 보람과 이익을 얻는 날이다. 55년 매매 소식이 일찍 들려온다. 67년 아랫사람으로부터 덕을 많이 보게 된다. 79년 능력을 크게 인정받는 하루다. 91년 지인과 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 03년 구설수가 뒤따르니 주의해야 한다. 32년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도록 유의한다. 44년 걱정이던 건강이 차츰 호전된다. 56년 명예가 드높아진다. 68년 뜻한 바를 비로소 성취하게 되는 날이다. 80년 명성을 널리 떨치게 된다. 92년 시험운이 약하니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한다. 33년 소원 성취하니 만사형통한다. 45년 꼬인 문서운이 다시 풀린다. 57년 일을 무리하게 진행하지 않는다. 69년 목표를 달성하려면 지금보다 더 노력해야 한다. 81년 우환과 질고가 빠져나간다. 93년 잘 아는 사람의 감언이설에 넘어가지 않는다. 34년 기쁨이 가득한 하루다. 46년 귀인이 나타나서 도움을 준다. 58년 꼼짝 않던 문서운이 잘 풀리기 시작한다. 70년 운이 좋으니 얼굴이 확 핀다. 82년 묵묵하게 계획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94년 먼저 계획을 잘 세운 뒤 진행하도록 한다. 35년 일이 빠르게 진행된다. 47년 안 되는 일이 생기면 일찍이 단념해야 한다. 59년 이사나 자리의 이동이 있다. 71년 금전운이 막혔다가 오후부터 다시 풀린다. 83년 혼자 고민하기보다 가족과 의논한다. 95년 일이 잘 안 되면 더 열심히 한다.

①즉석밥 종주국, 한국 아닌 '이 나라'... ②'햇반', ○○라 불릴 뻔...즉석밥의 모든 것

밥. 소비량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가슴이 벅차오르는 단어다. 그만큼 의미도 다양해 문자 그대로 음식, 즉 물에 끓인 쌀일 수도 있고 끼니나 식사를 가리킬 수도 있다. 더 확장하면 그런 끼니나 식사를 같이 하는 사회적 상황도 의미한다. "언제 밥 한번 먹자"는 말은 '언제'가 걸리기는 하지만 나름 친밀감의 표현이다. 우리는 밥을 함께 먹음으로써 더 가까워질 수 있다. 그런 밥이 요즘 우리에게 더 가까워졌다. 예전보다 밥을 더 열심히 해 먹고 있냐고?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다. 우리는 예전보다 확실히 밥을 덜 해 먹는다. 통계청의 2023년 양곡소비량조사 결과를 보자. 1인당 연간 양곡(쌀+기타 양곡) 소비량은 1981년 이후 40년 넘게 감소 추세다. 2023년의 양곡 소비량은 64.6㎏인데 30년 전, 즉 1993년의 122.1㎏에 비하면 절반 수준이다. 그중 쌀 소비량은 56.4㎏으로 전년 대비 0.3% 감소했다. 쌀 소비는 줄고 있지만 즉석밥 덕분에 밥은 예전보다 우리에게 더 가깝게 느껴진다. 전자레인지에 넣고 고작 2분만 돌리면 갓 지은 밥을 먹을 수 있다. 맛과 질감이 솥에 지은 밥에 비해 절대 열등하지 않다. 즉석밥이 우리 식생활, 더 나아가 삶 전반에 워낙 밀착돼 있어 한국이 종주국이라 여기기 쉽다. 하지만 역사는 다르게 말한다. 몇 분 안에 완성해 먹을 수 있는 즉석밥의 역사는 생각보다 훨씬 길다. 넉넉하게 잡자면 1923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가니스탄 국왕의 사촌인 아툴라 K. 오자이-듀라니가 석유화학 공부를 위해 미국에 정착했다. 어느 날 지인들을 모아 저녁 식사를 대접했다. 손님들은 치킨 라이스를 입을 모아 칭찬했다. 맛있는 이 메뉴를 더 많은 사람에게 먹일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석유화학자이자 생화학자, 원예가로 박학다식했던 듀라니는 손님들의 제안에 진짜로 즉석밥 개발에 나선다. 녹록지 않은 과업이었다. 지금부터 100년 전의 미국에서 쌀은 저장과 조리가 번거로운, 그래서 귀한 식재료였다. 쌀조차 구하기 쉽지 않은 여건 속에서 듀라니는 무려 18년이라는 세월을 들여 즉석밥을 개발해 낸다. 들인 세월에 반비례해 원리는 아주 간단했다. 쌀, 그러니까 장립종을 부분 조리한 뒤 탈수 및 건조시킨다. 조리는 레시피에 맞춰 준비한 끓는 물에 쌀을 붓고 저어 뚜껑을 덮어 두기만 하면 된다. 개발 연도가 1941년이었으니 시대를 감안하면 정말 엄청나게 획기적인 즉석 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즉석밥 개발을 마친 듀라니는 당시 저녁 식사를 함께 했던 손님들의 제안을 따라 더 많은 사람과 나눠 먹을 길을 찾아 나선다. 밥과 냄비, 그리고 휴대용 화로를 챙겨 미국 뉴욕의 식품 대기업 제너럴 푸즈(현 크래프트 하인즈)를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간부들 앞에서 '미니트 라이스(Minute Rice)'라 이름 붙인 자신의 즉석밥을 선보인다. 실제 조리는 5분 남짓 걸렸지만 그래도 보통의 쌀로 밥을 짓는 데 드는 15~30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시간이었다. 이런 효율과 잠재력을 믿고 제너럴 푸즈는 듀라니의 레시피를 일곱 자리 숫자의 거금, 즉 100만 달러 단위의 금액을 지불하고 사들였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 군용식으로 납품해 효용 및 품질 검증 절차를 거쳤다. 제너럴 푸즈는 1946년 민간 시장에 미니트 라이스를 출시했고, 1949년에는 대대적 광고에 나섰다. 대부분의 미국인에게 쌀은 주식이 아니었지만 제품의 간편함이 시대와 잘 맞아떨어졌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미국은 세계 최강국이 됐고, 덕분에 호황기를 누리느라 모두가 바빴으니 5분이면 만드는 즉석밥은 잘 팔렸다. 미니트 라이스는 지금도 현역이다. 필자는 1996년부터 26개월간 육군에 복무했다. 전투식량 중 두 종류의 즉석밥이 있었으니, 완전 조리된 밥을 밀봉 포장한 레토르트와 동결건조 밥이었다. 후자는 뜨거운 물을 부어 잠시 두었다가 먹었는데, 간편한 대신 죽도 밥도 아닌 괴상한 질감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처음 CJ(현 CJ제일제당)가 개발한 즉석밥도 우리에게 오늘날 친숙한 제품과는 사뭇 달랐다. 일본 즉석밥 시장의 성장을 지켜보면서 사업 가능성을 발견했고 1989년 알파미로 만든 냉동밥을 출시했다. 알파미는 쪄서 더운 바람으로 말린 쌀로 뜨거운 물만 부으면 밥이 된다. 하지만 맛도 질감도 좋지 않았으니 실패했고, CJ는 사업을 중단했다. CJ는 1993년에도 동결건조미로 즉석밥 시장에 다시 도전했으나 필자가 경험한 군용식 수준이었으니 소비자에게 외면당했다. 다른 업체들도 즉석밥 시장의 잠재력을 알아차리고 냉동 또는 레토르트 제품을 내놓았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대로 즉석밥 시장을 포기하기에는 사회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일단 1인 가구가 크게 증가했다. 1985년 약 66만 가구였던 1인 가구는 1990년 102만 가구, 1995년 164만 가구로 10년 사이 2.5배 늘어났다. 1인 가구의 특성상 편의성과 신속성을 중요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고 이는 식생활 변화와 직결됐다. 제대로 만든 즉석밥이라면 성공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기혼 여성의 취업률과 전자레인지의 보급률도 높아지는 추세였다. 1980년 375만 명이었던 취업 기혼 여성은 1990년 650만 명으로, 햇반 출시 직후인 1997년에는 710만 명까지 늘어났다. 미국에서 미니트 라이스가 그랬듯 기혼 여성이 취업하자 더 간편한 취사의 욕구 및 수요 또한 늘어났다. 전자레인지 보급률 또한 65%까지 올랐다. 1인 가구와 맞벌이 부부가 늘어나면서 가족 구성원 간의 생활 습관 차이로 식사를 따로 하는 문화가 자리를 잡게 됐다. 이에 맞추려면 취사가 좀 더 간소하고 신속해져야 하는 한편, 반조리 혹은 완전조리 제품 또한 적극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변화에 따라갈 수 있도록 CJ가 세 번째로 선택한 길은 바로 무균 포장밥이었다. 당시 일본은 즉석밥 시장에서 한국보다 10년가량 앞서가고 있었다. 1980년 레토르트밥, 1984년에 냉동밥이 출시됐는데 사실 본격적 성장은 1988년 무균 포장밥이 등장하면서였다. 무균 포장밥은 말 그대로 갓 지어낸 밥을 무균 상태로 포장한 제품이었다. 1995년 CJ는 드디어 무균 포장밥의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앞길이 험난해 보였다. 가장 큰 문제는 초기 투자 비용이었다. 쌀을 씻고 밥을 짓는 공정과 더불어 반도체 공장 수준의 클린룸을 갖춰야 밥이 담긴 용기 내외의 미생물을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었다. 그런 설비라면 최소 100억 원은 투자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그래서 사내에서도 의견이 갈렸고, 비용을 줄이고자 당시 대세였던 레토르트밥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안이 검토됐다. 하지만 시장 조사는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소비자가 원하는 건 그야말로 담백한, 집에서 지은 것과 같은 흰쌀밥이었다. 이런 밥을 편하게 먹을 수 있다면 소비자는 얼마든지 선택할 용의가 있었다. 결국 1996년 CJ는 100억 원 규모의 투자를 통해 클린룸 및 무균 포장 설비를 구축하고 그해 12월 즉석밥을 출시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햇반의 역사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는 '햇반'이라는 이름은 출시 전 브랜드 선호도 조사에서 꼴찌를 했다는 것이다. '옹솥밥' '밥또' 같은 이름이 더 좋은 반응을 얻었지만 결국 햇반으로 결정됐다. 햇반은 곧 가정과 시장에 정착했고 이후 폭발적 성장을 통해 오늘날 쌀 소비의 버팀목으로 성장했다. 2019년 4,860억 원이었던 햇반 매출은 2022년 8,150억 원까지 뛰었다.

정릉 '교수단지'라는 별천지...신혼부부는 마당 있는 단층주택을 지었다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자리 잡은 '교수단지'는 주택의 시간이 응축된 마을이다. 1960년대 서울대 교직원들이 땅을 사서 만들기 시작해 1980년대 후반까지 크고 작은 단독주택이 자리 잡았다. 2008년 이후 재건축 바람이 몰아쳤지만 주민들의 반대로 수년간 논란을 거듭하다 조합 설립이 취소됐다. 우여곡절 끝에 남은 단층 주거지엔 지금도 100여 가구가 살고 있다. 그중 하나가 박성수(37) 박선영(29) 부부가 반려견 '콘치'와 사는 1층 주택(대지면적 195㎡, 연면적 113.93㎡)이다. 4년 전 도심의 좁은 오피스텔을 벗어나 혼자 살 주택을 찾던 성수씨는 누나의 권유로 이 마을을 찾았다. "처음 왔던 때가 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드는 시점이었을 거예요. 담장을 따라 골목길을 걷는데 잘 가꿔놓은 푸릇푸릇한 마당이 보였어요. 서울에 이런 별천지가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랐고, 살고 싶은 곳을 찾았다는 생각에 마음이 놓이더라고요." 부동산중개인에게 소개받은 아담한 집을 둘러보고 곧장 매매를 결심했다. 박공지붕과 자그마한 정원이 있는 집은 온화한 동네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지만 원래 모습이 잘 유지돼 있었어요. 서울에 이런 집이 또 있을까 싶었죠. 조금만 손보면 근사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성수씨는 그 길로 평소에 선망하던 정수진(SIE 건축사사무소 소장) 건축가를 찾아가 레노베이션을 부탁했다. 젊은 건축주의 부탁으로 집을 찾은 건축가도 좋은 인상을 받기는 마찬가지. 잘 가꿔진 꽃길과 정원이 있는 동네다운 동네, 처음 자리에 소담하게 남아있는 오래된 단층 주택에서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정감을 느꼈다. 정 소장은 "동네의 정취를 보존하기에 마땅했고 그러자면 집의 형식을 유지해야 했다"며 "외관에선 동네와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감각을 자연스럽게 입히는 것이 과제였다"고 말했다. 교수단지의 특징은 크건 작건 집집마다 마당이 있다는 것이다. 마당은 각 주택의 얼굴이자 마을을 지탱하는 정서적 구심점이랄까. 실제 이 마을 주민들은 정성껏 가꾼 정원을 함께 감상하기 위해 매년 봄이면 이틀 동안 자신의 집 대문을 활짝 연다. 수년 전 재건축에 반대하는 주민들이 주축이 돼 시작한 '마을 가꾸기 운동'인데 지금도 '교수단지 정원 축제'라는 이름으로 이어가는 중이다. 성수씨의 집에도 작지만 수목을 가꾸기에 충분한 마당이 있었다. 건축가는 건축주의 정원 로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당의 면적과 형태를 최대한 그대로 유지했다. "자연을 느끼며 쉬어가는 마당을 둔다는 건 단독주택이니까 가능한 얘기예요. 증축할 수 있는 여지가 충분히 있었지만 마당을 확보하기 위해 지하 공간을 줄이고 출입구까지 옮겼죠. 마당에 많은 걸 내준 집이에요." 콘크리트를 걷어내 만든 잔디 마당은 집에서 가장 변화무쌍한 공간이 됐다. 건축주는 아직 정원을 완성하진 못했다고 했다. "나무와 꽃, 가구가 제자리를 찾는 데 시간이 좀 더 걸릴 거예요. 서두르고 싶진 않아요. 마당을 매만지면서 찬찬히 누리는 재미가 있거든요." 집 뒤편에 자리하는 옥상 테라스는 또 하나의 마당. 원래 있던 다락에는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지만 과감하게 통창을 설치하고 테라스 공간을 연결했다. 앞마당이 집을 드나드는 모든 사람이 즐길 수 있는 공적 마당이라면 뒤편에 만든 옥상 테라스는 집주인에게만 허락된 사적 마당인 셈이다. 한강 뷰처럼 화려한 분위기는 아니지만 오래된 주택지와 주변을 둘러싼 아파트 풍경을 조망하는 나름의 운치가 있다고. 성수씨는 "마당 있는 집에 살다 보니 늘 외부에 눈이 가고,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공간으로 발길이 향한다"며 "내부 면적을 포기하면서 야외 공간을 만든 건 지금 생각해도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원래 벽돌과 비슷한 벽돌 타일을 써서 과거 스타일을 고수한 외관과 달리 내부 공간에는 많은 변화를 줬다. 건축가는 우선 설계 당시 미혼 직장인이었던 건축주의 라이프스타일을 감안해 벽을 터 개방감을 극대화하고 심플한 스타일을 입혔다. "요리를 즐기는 건축주의 취미를 고려해 부엌 층고를 높이고 넓은 면적을 부엌에 할애했어요. 남성 혼자 사는 집이니 주방 가구나 싱크대에 짙은 녹색, 회색처럼 일반 가정집에서 잘 쓰지 않는 짙은 색상을 더했죠." 동시에 맥시멀리스트인 건축주가 소장한 살림을 수납할 공간을 확보해야 했다. 정 소장은 넘치는 피규어와 옷을 보관할 수납장을 만들기 위해 집 가운데 벽을 만들고 수납장을 짜 넣었다. 공간 한가운데 벽과 계단이 들어선 독특한 평면이다. 부엌과 거실의 맞은편에는 침실과 드레스룸, 욕실이 나란히 배치됐다. "집 중앙에 계단실과 함께 벽을 만들고 공적 공간과 사적 공간으로 이등분했다"며 "벽을 사이에 두고 순환하는 동선을 만들면 영역을 기능적으로 구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간을 유연하게 쓸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지하와 다락을 손보는 건 과거 흔적을 발견하고 잇는 과정이었다. 오래된 주택을 뜯다 보면 노후 정도에 따라 무너지거나 부서지는 경우가 많은데 이 집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철거하면서 발견된 구멍을 하나하나 매만지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갔다. 결과적으로 어둡고 축축하던 지하 공간은 미디어실로 탈바꿈하고 창고로 쓰던 다락은 층고가 20㎝ 올라가 어엿한 생활공간으로 바뀌었다. 성수씨는 "위아래 숨은 공간을 찾아내면서 단층 집의 한계도 극복할 수 있었다"며 "정교한 작품처럼 라이프스타일과 딱 맞아떨어진 공간"이라고 말했다. 오래된 새집이 주는 힘일까. 건축주는 이 집에 들어오면서부터 의미심장한 시작을 연달아 경험하고 있다. 집을 짓고 나서 얼마 안 돼 선영씨를 만나 연인이 됐고, 올해 초 결혼했다. 그리하여 성수씨 혼자 누리던 싱글하우스는 3개월 전 신혼집으로 변신했고, 연말쯤 태어날 아기의 생애 첫 집이 될 예정이다. "이 집이 인생의 좋은 전환점이 돼줬어요. 구성원이 늘면서 공간을 바꿔가는데 그 또한 큰 재미예요. 제 놀이터였던 다락은 그림 작업을 하는 아내의 아틀리에가 됐고 온전히 혼자 쓰던 취미방과 수납공간들도 이제 곧 육아용품들로 채워지지 않을까 싶어요. 그렇게 하나하나 움직이면서 내가 정말 살고 싶었던 집으로 완성되고 있어요. 살아가면서 집을 더욱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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