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 세상을 보는 균형

[백운산 오늘의 운세] 2023년 9월 27일

24년 바라던 소원을 성취한다. 36년 짜증 나는 일이 생기니 조심해야 한다. 48년 투자는 더 알아보고 움직여야 한다. 60년 근심이 불쑥 찾아온다. 72년 좋은 기회를 미루다가 근심만 쌓인다. 84년 방향을 제대로 알고 길을 나선다. 25년 새로운 것을 얻기 힘들다. 37년 소지품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한다. 49년 마음을 비우니 원하는 것을 얻는다. 61년 어려움 속에서 횡재수를 만난다. 73년 마음을 비우니 막힘없이 소통된다. 85년 시험 준비를 확실히 한다. 26년 어수선해도 마음은 흔들리지 않는다. 38년 뜻이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난다. 50년 재물 운이 아직 약하다. 62년 성냄을 줄이니 만사형통이다. 74년 여행은 몸살감기로 인해 미뤄진다. 86년 반갑지 않은 소식들만 들려 온다. 27년 많은 것을 가져도 마음이 편하지 않다. 51년 귀인이 나타나 소망을 들어준다. 59년 여유만만하니 일이 잘 풀린다. 63년 욕심을 안 부리니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 75년 하는 일이 순조롭지 않다. 87년 작은 이익도 따르지 않으니 짜증이 난다. 28년 막혔던 문서 운이 열린다. 40년 운이 안 좋아지니 여행을 뒤로 미룬다. 52년 지갑 속에 금전이 조금씩 쌓인다. 64년 일찍 집에 와 편히 쉬니 금상첨화다. 76년 시험 운이 좋아 얼굴이 밝아진다. 88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29년 몸살 감기가 떨어져 나간다. 41년 하늘을 보니 마음이 넓어진다. 53년 열심히 하여도 뜻대로 안 된다. 65년 문제가 발생해도 지혜롭게 대처한다. 77년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다. 89년 힘들면 쉬었다가 다시 시작한다. 30년 걱정하던 일이 풀려 좋아진다. 42년 근심이 오다가 사라지고 운수대통한다. 54년 최선을 다해 다시 시작한다. 66년 환하게 웃으니 막히는 일이 없다. 78년 기회가 한 번 더 찾아온다. 90년 노력을 하니 좋은 일이 많아진다. 31년 소원하던 일이 꼬였다가 다시 풀린다. 43년 근심이 생겼다 사라진다.55년 자금 사정이 조금씩 좋아진다. 67년 우수한 실적 평가를 받는다. 79년 어려움을 겪으나 희망이 보인다. 91년 실수 없이 무난히 넘어간다. 32년 고민이었던 일이 해결된다. 44년 마음의 안정을 되찾게 된다. 56년 미심쩍은 일은 다시 확인한다. 68년 금전 운이 차차 풀린다. 80년 짜증 나게 한 손재수가 사라진다. 92년 불미스러운 일이 더 커지지 않게 신경 써야 한다. 33년 바라던 소원을 성취한다. 45년 계단 낙상을 조심해야 한다. 57년 탁 트인 곳에서 편안히 지낸다. 69년 답답한 곳에서 벗어나니 운수대통한다. 81년 지인이나 동창생들과의 다툼을 피한다. 93년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다. 34년 중상모략하는 자가 있으면 경계해야 한다. 46년 컨디션이 좋아지니 기분도 최고다. 58년 바라던 소원을 성취한다. 70년 구설에 휘말리는 일이 생기니 조심한다. 82년 횡재수가 손재수로 변하니 조심해야 한다. 94년 새로운 곳에 취직한다. 35년 아는 길도 두 번씩 물어보고 움직인다. 47년 고였던 물이 넓은 곳으로 흐른다. 59년 문서 운이 다시 움직인다. 71년 어렵고 힘들 때 행운의 여신이 돕는다. 83년 구설수가 있으니 다툼을 피한다. 95년 다툼수가 생기니 여행을 미룬다.

1400년... 백두대간마저 숨죽인 '살아있는 전설' 속으로

오래된 나무는 자체로 경이롭다. 제천에서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태백으로 이어지는 왕복 4차선 국도로 접어들면 마음 바쁜 운전자가 많아 보인다. 상당수 차량의 목적지는 카지노의 도시 정선 사북읍이다. 그러나 여행자에게 이 길은 스쳐 지나기 아깝다. 영월읍을 통과하면서부터 좌우로 솟은 웅장한 산세가 드라이브의 재미를 더한다. 힘들게 찾아가야 볼 풍광을 차 안에서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길이다. 한때 대한민국 산업발전을 이끌었던 탄광지대는 이제 강원도의 대표 휴양지가 됐다. 가을이면 억새가 하얗게 뒤덮이는 민둥산, 고원 휴양지 하이원리조트, 해발 1,330m 만항재에서 이어지는 운탄고도까지 깊어가는 가을을 만끽할 수 있는 여행지다. 국내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1,400년 된 주목도 이 산중에 숨어 있다. 아직은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두위봉(1,466m) 자락이다. 두위봉 주목까지 가는 등산로는 사북4리 도사곡자연휴양림에서 시작된다. 사북읍은 동원탄좌로 기억되는 도시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는 1962년 개광해 2004년 폐광에 이르기까지 40년 넘게 산업화 시기 대한민국의 성장을 견인했다. 1980년대에는 탄광노동자만 5,000여 명에 달해 동양 최대 규모의 석탄 생산지로 성장했다. 농경지를 찾아보기 힘든 산골마을 사북을 읍으로 승격시킨 주역이기도 했다. 광산이 문을 닫은 지 어언 20년, 사북은 또 다른 의미에서 황금을 꿈꾸는 도시이자 고원 휴양지로 자리 잡았다. 도사곡마을은 사북에서도 후미진 읍내 서쪽 골짜기에 있다. 함백산 자락에서 발원한 지장천 물줄기가 서북쪽으로 흐르는 곳이다. 도사가 탄생할 만하다고 해 도사골로 부르기도 했다. 탄광 이전 아픈 역사도 깃들어 있다. 1908년 의병장 이강년 휘하의 부대가 대오를 재정비하던 중 일본군의 습격을 받아 80여 명이 장렬하게 전사한 격전지였다. 1986년 마을 입구에 당시 지역 의병장이던 김시중 전적비를 건립했다는데 온라인 지도가 잘못됐는지 찾을 수 없었다. 마을에는 40여 년 된 주공아파트만 탄광 도시의 흔적으로 남아 있다. 도사곡자연휴양림은 아파트 바로 옆이다. 휴양림 숙소와 야영시설이 작은 물줄기 좌우에 자리 잡고 있다. 등산로는 찻길이 끝나는 휴양림 꼭대기 주차장에서 시작된다. 처음 완만한 흙길이던 등산로는 곧장 돌길로 변하고 경사도 조금씩 가팔라진다. 주목이 뿌리 내린 곳까지는 약 3.2km, 해발 780m 부근에서 1,200m까지 고도를 높이는 동안 단 한 번의 평지도 없이 꾸준히 오르막이다. 대신 울창한 숲과 맑은 물소리가 계곡을 가득 메운다. 인공 조림 없이 전체가 천연 원시림이다. 군데군데 군락을 이룬 사스래나무와 거제수나무가 눈길을 잡는다. 순백의 자작나무와 달리 종잇장처럼 얇게 벗겨지는 껍질에 약간 붉은빛이 감돈다. 등산로 주변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때로 넓게 퍼져 늪지대를 형성한다. 바윗돌이며 주변에 고사한 나무에는 초록 이끼가 덮여 신비로움을 더한다. 어둑한 숲에 야생화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졸졸 흐르는 물가에 푸른빛 투구꽃이 듬성듬성 피어 있다. 길 중간 두 곳에 샘터가 있다. 퐁퐁 솟아나는 샘물은 아니지만 차고 달다. 갈증을 해소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주변에 벤치까지 놓였으니 잠시 숨을 고르기에 좋은 쉼터다. 두 번째 샘터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느닷없이 등산로를 자르고 대로가 나타난다. 산림관리를 위한 비포장 임도인데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잘려 나간 산허리가 깊은 흉터자국처럼 이어진다. 임도를 가로질러 이어지는 등산로는 폭이 한결 좁아지고 경사도 심해진다. 그럼에도 울창한 원시림의 면모는 한층 돋보인다. 오솔길처럼 이어진 돌계단 아래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구들장 위를 걷는 듯 보이지 않는 물소리가 그윽하다. 그렇게 약 500m를 걸으면 드디어 1,400년 주목과 마주한다. 두위봉 능선 동북 경사면에 세 그루가 약 30m 간격으로 뿌리 내렸다. 주목은 워낙 천천히 자라기 때문에 나이에 비해 키나 굵기가 다른 수종보다 작은 편이다. 첫인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이유다. 제일 아래와 위쪽 주목은 단단한 원줄기에 원뿔 모양의 늠름한 자태로, 가운데 주목은 아랫부분에서 두세 가지로 갈라져 서로 호위하듯 하늘로 치솟았다. 일부분은 속이 훤히 드러났음에도 서로 의지하며 곧은 수형을 유지하고 있다. 나선형으로 뒤틀리며 자란 나무는 키 17m, 가슴높이 둘레 4.36m, 직경 1.39m로 세 그루 중에서 가장 크다. 볼수록 경이롭고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세 그루 주목은 2002년 ‘정선두위봉주목’이라는 이름으로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수령 1,200~1,40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로 남한에서 가장 장수하고 있는 주목이다. 1973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소백산 정상의 주목 군락이 수령 200∼500년 정도임을 감안하면 얼마나 큰 어른인지 짐작할 수 있다. 흔히 ‘살아 천 년 죽어서 천 년’이라 하는데 두위봉 주목은 살아서만 천 년을 넘겼다. 주목은 껍데기가 붉은 빛깔을 띠어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신성한 나무로 대접받는다. 두위봉 주목이 지금까지 벌채되지 않고 살아남아 있을 수 있었던 건 이런 이유보다 온전히 사람의 접근이 어려운 높고 깊은 산속에서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가 발견된 것도 1990년이었다. 이만 한 나무에 그럴듯한 전설 하나 전해지지 않는 이유다. 시답잖은 이야기가 필요 없는, 존재 자체가 전설이자 역사다. 곧게 펴진 가지 아래로 멀리 백두대간 산줄기와 산골짜기 마을이 아른거린다. 오른쪽 끝자락으로는 매봉산 풍력발전단지 바람개비가 성냥개비처럼 보인다. 노거수의 위용이면 세상이 발아래다. 두위봉 남쪽 자락은 영월군 산솔면이다. 상동읍과 하동면(현 김삿갓면) 사이에 위치해 중동면이라 불렸던 곳이다. 단순한 방위 개념을 담은 지명을 2021년 산솔면으로 변경한 데에는 소나무 한 그루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산솔면에서 상동읍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를 따라가다 보면 도로 왼편 언덕에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단번에 눈길을 잡는다. 소나무에 대한 애정이 유달리 강한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머릿속에 떠올리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일정한 높이에서 갈라진 여러 가지는 휘어지면서도 강한 힘이 느껴지고, 균형을 잃지 않은 모양새다. 300년가량 된 이 명품 소나무는 그래서 오래전 담뱃값 모델로도 활용됐고 제약회사 로고로도 쓰였다. 소나무가 위치한 고갯길과 마을 이름이 ‘솔고개(松峴)’인 것도 모두 이 나무에서 비롯됐다. 영월은 청령포와 장릉 등 곳곳에 조선 6대 임금 단종의 애사가 깊이 서려 있는 고장이다. 숙부 세조의 핍박으로 폐위돼 머나먼 영월로 유배됐다 끝내 죽임을 당한 어린 임금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때로는 험준한 산줄기를 넘고, 때로는 동강과 서강 물줄기처럼 애잔하게 흐른다. 이 소나무에도 태백산의 산신령이 된 단종의 혼령이 솔고개를 넘을 때 배웅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소나무가 선 언덕 주변은 깔끔한 공원으로 조성돼 있다. 도로 양편에 주차장이 있어 잠시 쉬어가기 편하다. 뒤편으로는 우람한 바위 봉우리가 능선을 이루고 있다. 가을이 깊어지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낸다고 해 단풍산이다. 공원 아래 도로와 나란히 옥동천이 흐른다. 하천으로 내려서는 길목에 물고기 한 마리를 옆구리에 낀 수달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1급수 청정 계곡임을 자랑하는 표식이다. 하천 주변으로 산책로가 조성돼 있다. 훤한 대낮에 수달을 마주칠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맑고 시원한 물소리가 길손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도사곡자연휴양림에서 솔고개 소나무까지 가는 가장 짧은 길은 만항재를 거친다. 정선 태백 영월의 경계인 해발 1,330m 고갯길이다. 남한에서 여섯 번째로 높은 함백산(1,573m)이 손에 잡힐 듯하고, 석탄을 날랐던 구름 위의 도로 운탄고도 트레킹이 시작되는 곳이다. 고한에서 만항재까지는 대체로 무난하지만 만항재에서 영월 상동읍으로 내려가는 길은 구불구불 구절양장이다. 더구나 일부 구간은 교행이 쉽지 않은 시멘트 포장도로다. 천천히 차를 몰면 강원도 가장 깊은 골짜기의 가을 서정을 느낄 수 있다.

육아 나 몰라라, 시댁 편만 드는 남편... 이혼이 답일까요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시댁과의 갈등으로 남편과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서 이혼 위기에 있는 주부입니다. 시어머니와 결혼 초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남편은 제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원가족을 우선시했습니다. 그런 문제로 다투면서 남편과의 관계도 악화됐고 자연스레 '독박육아'를 하게 됐습니다. 불화의 씨앗은 상견례 자리에서였습니다.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를 보자마자 뜬금없이 "손주 낳으면 사돈이 키우세요"라고 하시면서 친정 식구들이 시댁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갖게 됐어요. 결혼 후에도 시댁 어른들은 며느리에 대한 애정이나 존중이 전혀 없었습니다. 딸이 시댁에서 존중받지 못하고 살까 봐 걱정하는 친정에는 문제가 없는 듯 시댁을 두둔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가 좁은 신혼집에 대가족인 자신의 친정 식구들을 데리고 오셨습니다. 빈손으로 오신 탓에 손님 접대는 제 차지가 됐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양해를 구하기는커녕 그런 모습을 당연한 듯 여겼어요. 그 이후로도 시어머니께서 자신의 친척 집에 저와 남편을 오게 하고, 정기적으로 조부모님을 찾아뵙게 하는 등 '도리'를 강요하면서 불만이 쌓여갔습니다. 시댁 행사를 소소한 부분까지 챙기는 남편은 친정 경조사는 전혀 챙기지 않았습니다. 제가 출산을 했을 때도 시댁에선 전화 한 통 하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서운하다'는 내색을 했지만 "어머니가 오시다 길을 잃으셨다"는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시댁에서 산후조리원에 들어간 비용을 지원해주겠다고 했지만 남편이 극구 거절해서 안 받았다는 사실도 나중에 알게 됐습니다. 저에게 들어온 출산 축하금으로 선심 쓰듯 산후 도우미를 고용하고 조리원 비용을 충당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서 실망했습니다. 첫 손주가 태어난 지 세 달 무렵까지도 아무 연락이 없다가 갑자기 시어머니가 친정아버지 구순 잔치에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된 아기를 불러내면서 갈등이 생겼습니다. 남편은 여전히 시어머니의 편을 들며 저를 무시했습니다. 그러다 큰 싸움이 났고, 남편은 충동적으로 친정 부모님에게 "딸을 칼로 찔러 죽이겠다"며 협박성 문자를 보냈습니다. 남편은 부모님에게 사과를 하기는커녕 친정에 발길을 완전히 끊어버렸습니다. 육아는 제가 도맡게 됐습니다. 남편은 집에 들어와도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이를 돌보지 않았고, 불만을 말하면 집을 나가버리는 패턴이 반복됐습니다. 한번 싸우면 계절이 바뀔 때까지 독박육아를 하는 생활의 연속입니다. 남편과 대화로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대화가 이어지지 않고 큰소리만 납니다. 아이 어린이집 관련하여 상의를 하는 것조차 제가 얘기를 많이 하는 게 싫다고 합니다. 저는 아무도 얘기를 나눌 대상이 없습니다. 얼마 전엔 일이 힘들다는 이유로 '육아휴직'을 내겠다고 통보했습니다. 집을 사느라 빚을 진 상황에서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남편을 보면서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지만 '능력껏 해보라'라는 윽박과 무시만 돌아왔습니다. 친정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신 상황이라 친정에 사정을 알리지 못했습니다. 가정에 소홀하고 엄마를 함부로 대한 친정아버지 때문에 홀로 어렵게 남매를 키운 어머니 슬하에서 자라면서 늘 외로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급히 한 결혼이 결국 다시 도돌이표처럼, 도망치고 싶은 가정으로 돌아왔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듭니다. 세상에 아이와 저, 둘뿐인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너무 두렵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 뭘까요. 박성희(가명·35·주부) 성희씨, 사연을 읽으면서 결혼 생활 내내 느꼈을 외로움과 서운함이 느껴져 마음이 아팠습니다. 당신은 배우자인 남편에게 온전히 의지할 수 있길 기대했지요. 특히 시댁과 갈등이 있었을 때 성희씨의 입장을 헤아리고 성희씨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랐을 겁니다. 하지만 매번 돌아오는 남편의 무심함에 많이 서운하고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홀로 육아와 살림을 도맡으며 아이를 키우느라 정말 고생 많았다는 이야기를 먼저 해주고 싶습니다. 성희씨에겐 시댁과의 갈등이 결혼 생활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 같습니다. 남편과의 불화를 부추기고 독박육아를 하게 한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생각해왔지요. 남편이 중재는커녕 시부모를 두둔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결혼 생활 동안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없었던 것 같아요. 성희씨 입장에서는 배우자에게 응당 기대할 만한 수준의 감정적인 역할과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평소 두 사람 사이에 정서적 교류뿐 아니라 형식적인 대화조차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남편 입장에서도 성희씨가 시댁과 남편에게 느끼는 불만을 알아차리기 어려웠던 부분이 있었을 걸로 보입니다. 성희씨 본인이 시어머니가 무리한 요구를 했을 때나 남편이 무책임한 행동을 했을 때 실제 생각이나 감정보다 훨씬 소극적으로 대응했다면 더욱 그랬겠지요. 아무리 불합리한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당사자가 정확한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남이 보기엔 상황을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함부로 대하기 쉽기 때문이죠. 성희씨가 결혼 생활 동안 이 모든 짐을 끌어안고 얼마나 힘들게 살아왔을지 눈에 선합니다. 시댁 어르신들의 무례한 행동을 참고, 지지가 충분히 필요한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느꼈던 서러움을 억누르며 홀로 전전긍긍했지요. 아마 마음 한편에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일 겁니다. 내 불만을 겉으로 표현하거나 거절하면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혼자 남겨질 수 있다는 막연한 불안감 말입니다. 그런 패턴이 반복되면 인간관계에서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고 분명하게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어쩌다 불만을 조금이라도 표현하면, 상대도 집을 나가버리거나 대화를 거부하는 식으로 성희씨에게 가장 취약한 외로움과 두려움을 공격해 잠재우게 됩니다. 성장과정에서 외로움을 많이 느꼈다고 했었지요. 가정에 무책임한 아버지를 대신해 홀로 힘겹게 남매를 키우는 어머니를 보며 어린 성희씨는 외로움과 무력함, 죄책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부담감에서 벗어나고 싶은 창구로서 결혼을 선택했을 만큼 성희씨에겐 너무나 버거운 감정이었을 겁니다. 결혼이라는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배우자인 남편에게 의지해 빈자리를 채울 수 있기를 원했지만 기대했던 수준의 정서적인 지지나 공감을 받지 못하면서 그 좌절감이 더욱 커졌겠지요. "내 이야기를 털어놓고 도움을 구할 사람이 없다", "친정도 친척도 없이 세상에 아이와 나 단 둘뿐이라 두렵다"라는 성희씨의 마지막 절규를 보고 안타까웠습니다. 다만 그 말에 성희씨가 겪는 괴로움의 핵심이 담겨 있다는 점을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성희씨는 이미 독립한 성인이고, 책임질 자녀가 있는 부모입니다. 하지만 내면 깊은 곳에 누군가의 도움을 갈구하고, 끊임없이 의지할 대상을 찾는 어린 아이가 있지요.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하거나 정리하기에 앞서 홀로서기 연습이 필요합니다. 무의식적인 패턴으로 자리 잡은 내면의 의존성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고, 혼자 남겨질 것 같은 두려움에 쉽게 사로잡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롯이 혼자 직면하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원가족에서 경험한 결핍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그 감정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시작입니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정서적인 교류가 없고 경제적으로도 무책임한 배우자와의 결혼 생활을 애써 유지할 이유가 없을 거예요. 다만 당장 이혼을 결정하기보다 '혼자가 되더라도 내 의견은 분명하게 전하겠다'는 태도로 상대에게 감정과 태도를 표현하는 연습을 해보라는 조언을 드립니다. 그런 과정을 뚝심 있게 반복하다 보면 자신감이 쌓이고, 관계도 원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바꿀 수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갈등 상황을 해결하는 방법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패턴화된 내 안의 의존성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성희씨는 아직 젊습니다. 내게 주어진 인생을 행복하게 보내려면, 내 딸을 독립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진지하게 고민하고, 용기를 냈으면 좋겠어요. 스스로 독립하지 못한 부모는 독립적인 자녀를 키워낼 수 없습니다. 엄마처럼 홀로 아이를 책임지며 살게 되고 아이에겐 외로움이 대물림될까 봐 참 두렵겠지만, 그럴수록 성희씨가 눈앞의 갈등에서 한발 떨어져서 두려움의 근원이 되는 과거 상처를 조금씩 마주하길 바랍니다. 그 첫걸음을 시작으로 자유롭고 소신 있는 인생을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사이트(https://www.hankookilbo.com/counseling) 또는 아래 바로가기를 통해 양식을 내려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라이프+

라이프 기획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