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되는 의사 선생님...못 만날까 봐 우울증 낫는 게 두려워요"

입력
2024.02.05 04:30
수정
2024.02.05 09:20
23면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일러스트=박구원 기자

회사에 다니는 40대 여성입니다. 가족 구성원의 알코올 중독과 폭력으로 인한 우울증으로 1년 동안 정신과 진료를 받으며 상담도 받고 약도 먹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술을 마시고 엄마를 폭행하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늘 무서웠고, 남동생이 이를 닮을까 봐 늘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내왔습니다. 지옥 같은 환경이었지만, 마음이 잘 맞는 엄마와 꿋꿋하게 견뎠습니다. 어떻게든 엄마의 버팀목이 되어 드리고 싶었고, 현재까지 그 관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직장 생활은 그럭저럭 겨우겨우 해나가고 있지만, 스스로가 눈치가 없고 우울하고 무기력한 사람으로 여겨집니다. 타인과 어울리기 어렵고 사교성도 없는 터라 여러 사람과 만나는 것보다는 혼자 있거나 친한 소수의 친구와 단 둘이 보는 편을 좋아합니다. 남들 눈에는 이런 제가 재미없는 삶을 사는 사람으로 보일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 방송이나 영화도 거의 보지 않고, 별다른 취미나 특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저를 보면 “저 사람은 도대체 무슨 재미로 살까”하는 생각이 들 것 같아요.

매일매일 한 시간씩 걷고 꾸준히 약을 먹는 등 우울증을 이겨내려는 의지는 매우 강합니다. 밥도 세 끼 잘 챙겨 먹고 다행히 불면증은 없습니다. 이렇게 규칙적으로 1년을 생활한 결과 최근 정신과 진료에서 선생님으로부터 얼굴이 많이 밝아 보여서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안도 조금 내려간 것 같다고 하시고요. 그도 그럴 것이 저는 선생님을 정말 믿고 따릅니다. 엄마같이 푸근하시기도 하고,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다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증상이 많이 나아졌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저도 모르게 덜컥 겁이 났습니다. 이러다가 ‘더 이상 진료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하면 어쩌지’하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정신과 진료받을 날만 손꼽아 기다립니다. 제 이야기를 공감해 주며 들어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일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선생님께서 병원 문을 닫는 날까지 계속 다니고 싶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나이가 있으셔서 앞으로 10년 정도밖에 더 일하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도 있어요.

이런 생각 때문인지 우울증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것 자체가 무섭기도 합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마음인지 모르겠어요. 우울증이 나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계속 정신과 진료도 받고 싶다니, 스스로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제게 ‘이제 더 이상 (병원에)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시면 서운해질 것 같아요. 이 때문에 우울증이 다시 생기는 건 아닐까, 걱정도 들고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이제는 부모님 모두 연로하셔서 제게 정서적으로 매우 의지하고 계시는데, 이 부분도 참 부담스럽고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합니다.

문수연(가명·41·직장인)


수연씨, 어려서부터 한집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알코올 문제를 겪으며 남동생마저 이를 닮을까 전전긍긍하며 자란 당신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하고 의지가 되어야 하는 존재인 부모로부터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어머니에게 버팀목이 되어 드리고 싶다고 여기며 자란 수연씨를 떠올리면 대견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연민의 마음도 듭니다. 사연에서 직장생활을 그럭저럭 겨우겨우 해나가고 있다고 표현하셨지만, 당신은 성실하게 노력해서 자신의 삶을 꾸려가고 계시는 듯합니다. 우울증을 이겨내려 꾸준히 상담을 받고, 또 규칙적인 생활을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는 의지도 있습니다.

이런 수연씨에게 정신과 진료와 주치의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감정은 낯설고 또 이해하기 어려우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사실 치료 과정에서 의사에게 의지하고 의존하는 것 자체가 이상하거나 드문 일은 아닙니다. 특히 정신과 의사의 경우 그러기 더 쉽습니다. 수연씨가 이를 이유로 자신을 지나치게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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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연씨가 느끼고 있는 “의사 선생님과 계속 만나고 싶다”는 욕구는 내면에 있는 ‘의존성’에서 나옵니다. 이런 의존성은 당신의 성장 과정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큽니다. 술을 마시고 폭력을 휘두르는 배우자를 견디면서 살아온 사람과 이를 지켜보며 자란 자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에게 보호받으며 안전감을 느끼고 충분히 의존하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환경에서 의존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면 성인이 된 후에도 결핍감이 지속됩니다. 그래서 의존할 대상을 무의식적으로 꾸준히 탐색하게 되죠.

수연씨의 어머니 역시 의존성이 큰 분 같습니다. 어머니는 시아버지와 남편 등으로 인한 본인의 어려움을 딸인 수연씨에게 하소연하며 의지하고, 당신은 그런 어머니에게 버팀목이 되는 관계가 됐을 것입니다. 의존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은 피학적인 관계를 통해 자존감을 키우기도 합니다. 폭력이나 폭언 등 부도덕적인 상황을 참고 견디는 자신이 (가해자보다) 더 도덕적인 존재이고 참고 희생하는 사람이라고 여기게 되는 것이죠.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고, 수연씨도 현재 연로하신 부모님을 챙기며 이와 같은 일종의 심리적 이득이 생길 수 있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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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수연씨는 정신과 의사에게 기대려는 눈앞의 현상보다 당신의 내면에 있는 의존성 해소에 집중해야 합니다. 누군가에게 정서적인 지지를 받고 싶어하면서 타인에게 의지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기 쉽습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본인의 능력이나 판단력을 불신하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

‘타인에게 절대 의지해서는 안 된다, 관계를 당장 끊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강한 의존성 문제를 해결하려면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과정을 일종의 과도기처럼 거쳐야 합니다. 이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수연씨의 감정과 마음을 담당 의사에게 털어놓는 것이 필요합니다. 주치의는 당신의 의사에 대한 의존 욕구를 서서히, 견딜 수 있을 수준으로 좌절시키면서 정신적인 독립을 돕는 단계를 밟도록 도울 것입니다.

수연씨 자신의 노력도 필요합니다.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 의지하면서 혼자 판단을 내려 결정하는 일을 스스로 제한하는 습관을 떨쳐내야 합니다. 아주 작고 사소한 것부터 스스로 결정해보면 어떨까요. 식사 때 무엇을 먹을지, 내가 번 돈을 어디에 쓸지 등을 어머니나 주변 사람, 혹은 환경에 맞추지 말고 마음 가는 대로 해보는 겁니다. 이런 판단을 내릴 때 마음이 찝찝하고 불편하더라도 이를 견뎌내야 자기에 대한 확신이 생깁니다.

수연씨는 본인을 깎아내릴 필요가 없습니다. 스스로를 ‘사회성이 부족하고, 텔레비전이나 영화도 보지 않는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수연씨의 스타일입니다. 사람들은 스타일이 저마다 달라요. 여럿이서 만나는 자리가 아니라 소수의 친구들과 관계를 맺는 방식을 선호한다고 해서 성격에 문제가 있거나 뒤떨어지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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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스스로에게 지나친 제한을 두는 수연씨의 경우 이런 선을 조금씩 벗어나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가끔은 소그룹 모임이나 취미 동호회 활동을 시도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또 독서나 그림, 요리 등 본인에게 맞는 취미를 찾아보는 과정도 자기 확신을 가지는 데 영향을 줍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다”라는 걸 알게 되는 것이죠. 이처럼 자기 결정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결정하고 행동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평소 자기의 생각과 감정을 제대로 살피고 인식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감정 일기’를 통해 평소 수연씨가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갖고 지내는 지를 구체적으로 써보는 겁니다. 이런 습관을 통해 본인의 생각을 평소에 잘 이해하고 있어야 행동으로 옮기기도 쉬워질 것입니다.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부모님의 정서적인 의존도 마찬가지입니다. 의지라는 개념은 상호적이라서 누군가가 자신을 의지한다는 일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만족스러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님의 요구대로 해드리게 되면 오히려 당신에 대한 부모님의 의존을 키우기도 합니다.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런 부모님과 스스로를 지나치게 동일시하면서 요구를 거절하기 힘든 거죠. 부모님이 갑자기 병에 걸리신다면, 수연씨는 모든 것을 뒤로한 채 앞장서서 돕게 될 수 있습니다.

수연씨의 살아온 과정을 보면, 책임감을 갖고 자기 역할을 다 해온 능력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해법이 지금 당장은 버겁더라도 하나씩 해나간다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해나갈 수 있을 겁니다.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당신이 원하는 삶을 이뤄내려 한 발 한 발을 옮기고 있는 수연씨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정리=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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