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가 효율적이라고? '시간 주권' 찾아야 가짜노동 사라져"

입력
2024.02.29 10:30
8면

[가짜노동: ⑦노동전문가들 해법 들어보니]
펜데믹 재택 경험, 해외 주4일 흐름에도
한국, '투입 比 산출' 안 따지고 긴 노동
정규직 늘려 '헌신 강박' 업무량 줄여야
노동자 '시간 자기결정권' 확대할 필요

지난달 22일 '가짜노동' 좌담회에 참석한 노동 전문가들. 왼쪽 사진부터 정영훈 부경대 법학과 교수,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 손연정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윤서영 인턴기자, 정영훈 교수 제공

지난달 22일 '가짜노동' 좌담회에 참석한 노동 전문가들. 왼쪽 사진부터 정영훈 부경대 법학과 교수,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 손연정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윤서영 인턴기자, 정영훈 교수 제공


"우리는 '시간이 많다'는 생각에 너무 익숙해져 있습니다. 휴일 노동과 야근을 밥 먹듯이 해도 문제라고 생각 못 하죠. 사람 귀한 줄 알면 시간 귀한 줄도 알아야 합니다."

'가짜노동'이 한국사회를 갉아먹고 있다. △눈치노동 △허식노동 △의전·의례노동으로 대표되는 가짜노동이 일터를 잠식한 결과, 생산성은 떨어지고 업무 만족도는 하락했다. 비효율 업무에 시간을 빼앗긴 개인의 삶이 황폐해진 건 물론이다.

왜 한국에는 가짜노동이 만연한 걸까. 노동전문가 4인에게 물었다.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 손연정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 사옥에서 머리를 맞대고 행복한 노동을 위한 해법을 고민했다. 노동법 전문가 정영훈 부경대 법학과 교수도 조언해줬다.

책 '가짜노동' 돌풍 이유는?

손연정 한국노동연구원 위원이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 대회의실에서 열린 가짜노동 좌담회에 참석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손연정 한국노동연구원 위원이 지난달 22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 대회의실에서 열린 가짜노동 좌담회에 참석해 한국의 노동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_데니스 뇌르마르크의 저서 '가짜노동'이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손연정(이하 손)=세 가지 이유가 있다. ①우선 이 책이 나온 시기가 딱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다. 사람들이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그간 사무실로 출근했을 때 얼마나 불필요한 업무가 많았는지 느끼게 된 것이다. ②둘째, 장시간 노동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해외에선 이미 주 4일제 실험을 하는 등 노동시간을 줄이는 방향으로 사회적 흐름이 굳어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은 노동시장 개혁을 얘기하지만, 연장근로 한도를 축소하는 등 오히려 역행하는 측면이 있다. 노동자들이 의문을 갖게 된 이유다. ③청년층이 노동시장의 주력 세대로 부상한 것도 영향을 줬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을 강조하는 젊은 세대가 더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문제의식은 더욱 확산될 것이다.

정영훈(이하 정)=이 책의 놀라운 점은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긴 일조차 가짜노동이란 사실을 알려줬다는 데 있다. 전략기획, 관리, 홍보, 서류작업 등 관성적으로 중요 업무라 생각했던 일이 실은 노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민간부문이 공공부문보다 효율적일 것이라는 신화도 깼다. 편견을 뒤집는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인 것 같다.

빨리빨리 민족, 산출물 자체에만 관심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이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김종진 일하는시민연구소 소장이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_한국은 효율성을 중시하는 나라다. 그런데도 가짜노동이 만연한 이유가 궁금하다.

=우리가 과연 효율성을 중시할까?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국에서 효율성은 그저 빨리 처리하는 것이다. 투여한 시간 대비 결과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는다.

이병훈(이하 이)=한국사회의 효율성은 사람을 갈아 넣는 형태를 띠고 있다. 효율성은 투입 대비 산출을 의미하는데, 한국은 산출만 어떻게든 끌어내면 투입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실제로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33위에 불과하다.

김종진(이하 김)=시간에 비례한 효율성을 따지는 게 중요하지 않나. 근데 이 책에는 일주일 평균 노동시간이 50시간을 넘기면 부가가치가 전혀 생산되지 않는다고 나온다. 63시간을 넘기면 오히려 생산성이 떨어진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 근로복지공단 질병판정위원회는 일주일 평균 노동시간이 석 달 동안 64시간을 넘기면 과로사로 판정하고 있다. 결국 장시간 노동과 가짜노동은 효율적이지도 않으며 조직과 개인에 기여하지도 않는다.

=한국은 비정규직 비율은 높은 반면, 정규직 전환율은 해외 선진국에 비해 굉장히 낮다. 이런 구조적 불안정성 탓에 가짜노동이 조장된다고 생각한다. 헌신하고 희생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에 가짜노동을 불사하는 것이다.

"내 시간을 내가 결정하는 '시간 주권' 필요"

정영훈 부경대 법학과 교수. 정 교수 제공

정영훈 부경대 법학과 교수. 정 교수 제공

_가짜노동을 줄이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

=시간 주권을 확립하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시간 주권은 노동과 여가 등 개인의 시간을 노동자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유럽연합(EU)에서도 참고하는 네덜란드의 사례를 보자. 네덜란드는 시간뿐 아니라 노동장소도 개인이 결정할 수 있다. 이런 사례를 참고해 노동시간을 감축해 나가야 한다. 포괄임금제를 없애고 사용자에게 노동시간 관리 의무를 부여하는 방안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노동자의 시간 주권과 자기 결정권 확대는 정말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한국의 기업에선 직장 내 불신이 팽배해 주권 확대가 잘 이뤄지지 않는다. 일례로 정보기술(IT) 강국이 무색하게 재택근무 활용률이 턱없이 낮다. 감염병 사태로 늘어서 2021년에 전체 임금노동자의 5% 정도가 재택근무를 활용했는데, 그나마도 이듬해 다시 4%대로 돌아왔다. 분명 재택근무를 해도 생산성에 영향이 없다는 연구 결과가 있는데, 왜 다시 사무실로 복귀했을까. 신뢰 관계 형성이 안 됐기 때문이다. 사측이 직원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법적·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 재택근무, 선택적 근로시간제 도입 등 유연한 근무 방식을 활용해 노동자들의 자율성과 권한을 강화해야 한다.

=우리 기업의 경영 및 관리 방식에 불신이 과도하게 투영된 건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노동자는 그들대로 '내가 이렇게 꼼짝 못 하고 일하는데 좀 내 식대로, 틈새로 가짜노동을 만들면 안 돼?'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한국사회에 지금처럼 불신이 퍼져 있는 한 가짜노동을 없애긴 쉽지 않을 것이다. 청년세대가 세대 전환의 역할을 수행해 변화의 물꼬를 터주길 기대한다.

"사회 안전망부터 갖추고 논의해야"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가 좌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윤서영 인턴기자

_기업 차원의 노력도 필요한데.

=SK그룹, 포스코 등 최근 민간기업들이 주도적으로 주 4일제를 실험하고 있다. 환영할 만한 일이다. 대기업이 주도하면 중소기업은 이런 트렌드를 좇는 경향이 있다. 이 때문에 좋은 선례를 남기는 것이 중요하다.

=사실 주 4일제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이 많았지만 막상 해보니 너무 잘 시행되고 있다. 또 '사무직은 가능해도 병원 같은 특수 업종은 안 될 거야'라는 생각을 많이들 했는데, 세브란스병원에서 진행하는 주 4일제 실험도 매우 성공적이다. 참여한 간호사들은 남는 시간에 자격증을 배우고, 가족과 시간을 보낸다. 덕분에 환자에게 더 친절해졌고, 퇴사율은 0%로 떨어졌다.

_경계해야 할 지점도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책에서 해법으로 개인적 차원의 불복종을 얘기한다. 가짜노동을 요구받을 때 "아니오"라고 단호하게 말하라는 것. 하지만 이 같은 반응은 사회안전망이 잘 구축됐을 때나 가능하다. 한국사회가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과 비슷한 수준의 안전망을 구비하고 있는지 따져 봐야 한다. 사회안전망이라는 선결 조건이 담보되지 않은 상태에서 노동자 개인에게 가짜노동을 해결하라고 요구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한국의 노동시장은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하는 1차 노동시장과 상대적으로 고용이 불안정하고 임금이 낮은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뉜다. 가짜노동을 없애기 위해 정부와 기업, 노동자들이 합심해 노력해야 1차 노동시장을 넘어서는 긍정적 파급 효과를 낼 수 있다. 격차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논의가 흘러가선 안 된다.


전유진 기자
이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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