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러스트벨트' 한국엔 '쌀벨트'···여야, 쌀값 갖고 싸우는 이유

입력
2022.10.10 17:00
수정
2022.10.10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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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꼬집은 소금이나 설탕 따위의 양념을 엄지와 집게손가락으로 집어올린 양을 의미합니다. 아주 적은 양이지만 때로는 꼬집 하나에 음식 맛이 달라지듯, 이슈의 본질을 꿰뚫는 팩트 한 꼬집에 확 달라진 정치 분석을 보여드립니다.


지난 5일 오후 경기 여주시 점동면 여주 통합 RPC에서 열린 '쌀 수매가 안정화 대책 마련 촉구 집회'에서 여주시 농업인단체협의회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주=연합뉴스

지난 5일 오후 경기 여주시 점동면 여주 통합 RPC에서 열린 '쌀 수매가 안정화 대책 마련 촉구 집회'에서 여주시 농업인단체협의회 회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여주=연합뉴스

"태국이 유사한 정책을 추진했다가 쌀 공급이 과잉 되고 재정 파탄이 나서 경제가 거덜난 적이 있다."(김대기 대통령실 비서실장)

"이런 것이야말로 속도전으로 국민의 뜻에 따라 주어진 권한을 최대치로 행사해야 하는 사례다."(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쌀이 정치권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여야 대표는 물론, 대통령 비서실장, 국무총리까지 틈만 나면 우리 쌀 문제를 입에 올리고 있다. '날치기 통과' '포퓰리즘 법안' '재정 파탄' 등 과격한 표현도 수시로 오간다. '쌀 수급 균형을 이뤄 안정적인 농민 소득을 보장하자'는 데에는 의견 일치를 보이는 여야가 이렇게까지 극한 대치로 치달은 이유는 무엇일까.


野, 쌀 매입 의무화로 농심(農心) 선점... 與 "재정 파탄" 뒤늦게 흔들기

갈등의 중심에는 정부의 쌀 매입을 의무화하는 양곡관리법 개정안이 있다. 지금도 쌀이 수요량의 3% 이상 초과 생산되거나 수확기 가격이 지난해보다 5% 이상 하락할 경우 정부가 쌀을 사들이게 돼 있다. 하지만 강제 조항은 아니다. 올해 쌀값이 전년 대비 20% 넘게 폭락하며 '농심(農心)'이 심상치 않자 민주당은 이 부분에 손을 댔다. 초과 생산된 쌀 강제 매입 조항을 넣은 양곡관리법 개정안을 '7대 핵심 추진과제'에 포함시킨 뒤 거대 의석을 동원해 입법을 밀어부치고 있는 것이다.

민주당의 논리는 쌀 과잉 생산 시 정부가 무조건 쌀을 사면 올해 같은 쌀값 폭락을 막을 수 있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하지만 반론도 만만치 않다. 과잉 생산된 쌀을 의무적으로 매입하게 하면 도덕적 해이가 발생해 시장에서의 조정 기능이 이뤄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막대한 재정 부담을 초래한다" "쌀 공급과잉 구조를 심화시킨다"며 "포퓰리즘적, 선동적인 법안"이라는 입장이다. 다만 국민의힘도 쌀 과잉 생산에 따른 농가의 손실을 보전해줘야 한다는 방향에 대해선 이의를 달지 않는다. 다만 의무 매입이라는 방법론에서 생각을 달리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그럼 쌀 매입 의무화에 따른 재정은 얼마나 들어갈까. 한국농촌경제연구원(KREI)은 최근 보고서에서 쌀 시장격리를 의무화하면 2030년까지 연평균 46만8,000톤의 쌀이 과잉 생산되고, 재정 소요액이 연평균 1조443억 원 든다고 추산했다. 하지만 일각에선 "국책 연구기관이 정부·여당의 요구에 맞춰 짜맞추기식 부실 보고서로 화답한 것"(민주당 전국농어민위원회)이며 실제로는 이보다 적을 것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지난달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소병훈 위원장과 이양수 국민의힘 간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대근 기자

지난달 2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소병훈 위원장과 이양수 국민의힘 간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오대근 기자


美 '러스트벨트' 있다면 우리나라는 '쌀벨트' '마늘벨트'


이쯤에서 드는 의문이 하나 있다. 이 법의 수혜계층이 되는 농민 표가 얼마나 되길래 민주당이 이렇게 사활을 걸고 입법을 주도하느냐다. 통계청 농림어업총조사에 따르면, 2020년 농업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4.5%에 불과하다. 2000년(8.8%)과 비교하면 불과 20년 사이에 반토막이 났다. 농업 인구 숫자만 놓고 보면 231만4,000명으로 같은 기간 42.6% 급감했다.

그럼에도 농심이 정치권에 미치는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우선 관련 이슈를 담당하는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위원들은 대부분 농촌을 지역구로 둔 의원들로 구성돼 있다. 인적 구성상 자연스럽게 농민의 이익을 대변하기 마련이며 농민단체의 입김도 무시할 수 없다. 농업 인구 수가 적기는 하지만 단순히 숫자로 접근하기에는 농심이 미치는 영향력도 만만치 않다. 한국의 도시화가 워낙 빠른 속도로 진행돼 왔기 때문에, 도시에 거주하는 출향민이 고향인 농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있어서다.

과거 중국산 마늘에 대한 수출 제한 조치나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때마다 농심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정치에서 '러스트벨트' '레드넥'이 있다면, 우리 정치에는 '쌀벨트' '마늘벨트'가 있는 셈이다.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농림축산식품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정황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이 4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농림축산식품해양수산위원회 농림축산식품부에 대한 국정감사에서 의원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국회사진기자단


與·野, 정국 주도권 다툼 성격 .... 전문가 "의무화 논란은 사회적 낭비"

현재 법안은 국민의힘의 요청으로 최장 90일간 논의할 수 있는 안건조정위원회로 올라간 상태다. 하지만 양곡관리법 개정이 여야가 이렇게까지 극한 대치를 할 이슈인지에 대해선 의문부호가 따라붙는다. 갈수록 쪼그라드는 농업의 미래에 대한 해법은 어느 정도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줄어드는 쌀 수요에 맞춰 쌀 생산을 줄이고, 대신 콩 등 다른 작물로 농민들을 유인해 식량자급률을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식생활 변화에 따른 구조적 변화에 대응하되, 식량주권 확보라는 가치도 함께 가져가야 하기 때문이다. 2018~2020년 시행된 논 타작물재배지원사업, 내년에 처음 시행되는 전략작목 직불 모두 이 같은 목표를 갖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도 대선후보였던 지난 2월 '식량주권 확보'를 강조하며 "밀·보리·콩 같은 기초 식량 (자급률) 목표치를 확실하게 달성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쌀 매입 의무화 역시 조정 가능한 영역으로 보인다. 의무화를 주장하는 민주당에서도 "자동 시장격리가 매년 있어야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신정훈 의원·9월 15일)라고 말한다. 올해처럼 쌀값이 폭락하는 특수한 상황을 막기 위해 의무화 조건을 만드는 것이지, 매년 이 조항을 발동해 1조 원의 재정을 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김인중 농식품부 차관이 "(의무 매입) 요건의 정도가 문제"라고 하자, 윤준병 민주당 의원은 "그 내용에 대한 조정을 하면 되는 것"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매입 조건(3% 초과생산·쌀값 5% 하락)을 협의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읽힌다.

의무화를 하더라도 현재 시행하고 있는 정부의 시장격리와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주장도 있다. 정황근 농식품부 장관은 4일 농식품부 국정감사에서 "양곡관리법에서 정한 요건에 맞는 상황이 11번 있었다. 그중 10번 시장격리를 했다"며 "의무화하지 않고 지금처럼 필요할 때 확실히 시장격리를 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지난달 28일 전북 정읍시 이평면 만석보 들녁에서 정읍농민회가 주관하는 '쌀값 보장 농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논 갈아엎기 집회'가 열렸다. 쌀값 보장을 요구하는 농민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수확 전 벼를 갈아엎고 있다. 정읍=뉴시스

지난달 28일 전북 정읍시 이평면 만석보 들녁에서 정읍농민회가 주관하는 '쌀값 보장 농민생존권 쟁취를 위한 논 갈아엎기 집회'가 열렸다. 쌀값 보장을 요구하는 농민들이 정부에 항의하는 뜻으로 수확 전 벼를 갈아엎고 있다. 정읍=뉴시스

전문가들은 시장격리 의무화가 이렇게까지 논쟁의 대상이 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정부가 올해 쌀값 폭락을 사전에 막지 못하면서 빌미를 제공했고, 야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잘 활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임정빈 서울대 농경제사회학부 교수는 "의무화를 할지 말지 따지는 것은 사회적 낭비"라며 "근본적인 해결방안은 논에 다른 작물을 심었을 때 쌀에 준하는 소득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지원 정책"이라고 말했다.

다만 관건은 역시 재정이다. 농민들이 쌀 대신 다른 작물을 짓도록 하는 유인책에 적지 않은 국가 재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과 일본 등은 이를 실시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 지적이다. 임 교수는 "미국, 일본 등은 식량안보, 식량자급률을 1번 순위로 놓고 있다"며 "우리나라는 돈을 적게 쓰면서 해결하려다 보니 의무화와 같은 임시 방편적인 것만 만들어 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손영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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