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과 빨강에 신이 깃드는 순간, 메리 크리스마스!

입력
2022.12.19 04:20
20면

초록색 잎에 빨간 열매 조롱조롱 달고 있는 식물들
크리스마스처럼 초록과 빨강 빚은 백량금·자금우·산호수

편집자주

허태임 국립백두대간수목원 연구원이 격주 월요일 풀과 나무 이야기를 씁니다. 이 땅의 사라져 가는 식물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허 연구원의 초록(草錄) 이야기를 만나 보세요.

백량금. 꽃시장에서는 만량이라고 부른다. 잎 가장자리가 박음질을 한 것처럼 도드라진 이유는 박테리아가 그곳에 살기 때문이다. 사진은 제주도 곶자왈에서 몇 해 전 성탄절 무렵에 담았다. 이하 사진은 허태임 작가 제공

백량금. 꽃시장에서는 만량이라고 부른다. 잎 가장자리가 박음질을 한 것처럼 도드라진 이유는 박테리아가 그곳에 살기 때문이다. 사진은 제주도 곶자왈에서 몇 해 전 성탄절 무렵에 담았다. 이하 사진은 허태임 작가 제공

크리스마스는 초록과 빨강의 대비로 감각된다. 할머니가 빨간 천으로 양말 모양의 커다란 주머니를 만들 때면 어린 나는 선물을 많이 넣을 수 있도록 최대한 더 크게 만들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는 그걸 들고 마당에 나가 상록의 반송가지에 걸었다. 초록 나무에 걸린 빨간 양말에 산타할아버지가 갖다 주실 선물을 기다리면서.

초록과 빨강의 대비는 도시가 아니라 숲에서 느낄 때 한껏 더 색감이 뚜렷해진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우리나라 남쪽 지방의 난대림에는 초록색 잎에 빨간 열매를 조롱조롱 달고 있는 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자금우과 자금우속 식물 삼형제가 거기 산다. 백량금과 자금우와 산호수.

빨간 열매가 달린 이 식물들을 ‘연기물(緣起物)’로 여겨 일본인들은 새해에 이를 선물하며 복을 비는 전통이 있다. 사찰의 제단에 올리는 귀한 식물이기도 하다. 부처님 조각상과 관련된 불교 용어 자금(紫金)을 따와 지금의 이름 자금우가 되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일본은 이 자금우속 식물 세 종을 에도 시대부터 즐겨 키웠다. 특히 변이개체를 선별해서 기르는 게 유행처럼 번져서 18세기에는 잎에 무늬가 들어간 개체들이 원종의 500배가 넘는 가격으로 거래될 정도였다. 일본 니가타현을 중심으로 자금우 투기가 성행했고 때로 매매를 엄격하게 단속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그 붐 덕분에 19세기 말에 자금우속 식물 품종이 100여 개가 넘게 생겨났다. 그들이 널리 퍼져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실내식물이 되었다. 꽃집에서는 자금우와 산호수의 품종을 아울러 ‘천량’이라고 하고 백량금의 품종을 ‘만량’이라고 한다.

백량금과 자금우. 둘 다 풀이 아니라 나무다. 가운데 깡총하게 백량금이 서 있고 자금우는 그 아래에서 땅을 뒤덮은 채 풀처럼 자란다. 북한에서 백량금을 선꽃나무라고 부르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백량금과 자금우. 둘 다 풀이 아니라 나무다. 가운데 깡총하게 백량금이 서 있고 자금우는 그 아래에서 땅을 뒤덮은 채 풀처럼 자란다. 북한에서 백량금을 선꽃나무라고 부르는 이유를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같은 혈통의 형제 식물답게 그들은 서로 닮았고 또 서로 다르다. 그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해 동아시아 난대림에 산다. 풀처럼 보이지만 엄연한 나무다. 늘 푸른 초록색 잎에 크리스마스가 다가올 때쯤 열매가 빨갛게 익는다. 암술이 길어서 꽃잎 바깥으로 쏙 튀어나온 모습이 전체적으로 화살 모양이다. 꽃잎 끝이 뾰족한 화살촉처럼 생겨서 그들을 통칭하는 속명은 화살과 관련된 라틴어 ‘아르디시아(Ardisia)’다.

땅 위를 기듯이 작달막하게 자라는 나머지 두 종에 비해 백량금은 저 혼자 깡총하게 키가 좀 큰 편이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선꽃나무라고 부른다. 자금우는 자색이 도는 흰 꽃이 피기 때문에 순백색 꽃이 피는 나머지 종들과 차이가 난다. 산호수는 몸 전체에 털이 많은데 그 모습이 마치 산호 표면의 돌기처럼 오돌토돌하게 보여서 다른 두 종과 확연히 구분된다. 열매는 이름처럼 바다의 보석인 붉은 산호를 쏙 빼닮았다.

우리나라 남부지방 난대림에 사는 자금우. 제주도 곶자왈에서 몇 해 전 성탄절 무렵에 담았다.

우리나라 남부지방 난대림에 사는 자금우. 제주도 곶자왈에서 몇 해 전 성탄절 무렵에 담았다.

나는 제주도 산양과 청수 곶자왈의 백량금이 사는 숲을 정말 좋아하고 아낀다. 백량금과 그 밑에 자라는 자금우와 그 옆에 자라는 산호수를 그 숲에 가면 한 번에 볼 수가 있다. 어여쁜 백량금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누가 붙인 건지 몰라도 이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이 든다. 백 량(백 대의 수레)의 금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만량’이라는 별칭을 더했으니, 참으로 절묘하다.

그들 잎에는 값을 매길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자연의 비밀이 숨어 있다. 그들의 잎을 자세히 보면 잎 가장자리가 구불구불 물결을 이루며 잇따라 넘실거리는 모양이고 박음질한 것처럼 도드라져 있다. 원래 그렇게 생긴 게 아니고 박테리아가 그곳에 살기 때문이다. 콩과 식물과 난과 식물의 뿌리에 사는 박테리아인 균근은 식물과 미생물의 공생관계로 비교적 잘 알려져 있고 연구의 역사도 긴 편이다.

그에 반해 백량금 잎 가장자리에 사는 균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려진 게 없다가 최근 들어 한둘 밝혀지고 있다. 백량금 잎에 사는 건 부르크홀데리아(Burkholderia)의 일종인데 그 균을 떼어내면 균도 죽고 백량금도 죽는다는 것, 그들은 철저하게 공생하기에 백량금은 후손에게 균을 온전히 물려주는 적응방식을 선택했다는 것, 그 ‘공진화’를 인간의 삶에 필요한 재배 기술과 치료 기술에 적용할 수도 있다는 것 등이다. 새롭게 알게 된 그 정보가 내게는 산타할아버지가 식물 편으로 보낸 어떤 선물처럼 다가온다. 정복하고 승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존이라는 것을 박테리아마저 껴안고 살아가는 식물한테서 배워야 한다는 귀중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 같아서다.

백량금과 자금우와 산호수가 빚은 초록과 빨강에 신이 깃드는 때가 멀지 않았다. 우리 모두 아무튼, 메리 크리스마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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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임의 초록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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