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법과 중산층을 위한 외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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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8 00:00
27면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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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반도체법의 첫 집행이 임박한 상황에서 지난주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부 장관이 한 연설을 통해 이 법으로 미국이 이루려는 목표와 장기 비전에 대해 언급하였다. 우선 이 법의 구체적인 목표. 그는 2030년까지 미국에 두 곳의 새로운 대규모 반도체 제조 클러스터를 조성하여 최첨단 반도체칩을 제조하는 역량을 확보함과 동시에 패키징, 연구개발설비 등을 포함한 견고한 반도체 공급자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 아울러 미국 반도체 팹들이 첨단 메모리칩은 물론 자동차 의료기기 등에 사용되는 중저가 레거시 칩도 생산하여 안정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제시하였다.

현재 미국 벤처투자의 3%만이 하드웨어 부문에 투입되고, 스타트업들이 반도체 부문에 진입하는 데 드는 비용이 5억 달러 이상으로 증가하여 반도체 부문의 활력과 역동성이 떨어진 상황이다. 새로 설립되는 국립반도체기술센터를 정부와 투자자, 기업, 대학, 연구소 등이 함께 네트워킹의 구심점으로 키우는 한편 아이디어가 구체적인 상품으로 개발 및 생산되는 비용도 획기적으로 줄여 차세대 양자컴퓨팅, 인공지능, 반도체 소재에 대한 연구를 미국이 선도하겠다는 목표도 드러냈다. 결국 미국 내에서 발명, 디자인, 제조, 패키징이 동시에 진행되면서 미국은 첨단기술 연구개발과 첨단제조 역량을 동시에 확보한 유일한 국가가 될 것이며 안정된 공급망 확보와 기술 리더십 유지는 미국의 경제성장과 국가안보의 토대가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미국이 제조업 뒷받침 없이도 첨단기술 리더십을 유지할 수 있다고 잘못 판단해 왔음을 반성하면서, 반도체법이 제조업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미국 건국시조 해밀턴으로부터 케네디 행정부의 우주탐사를 위한 대대적인 과학기술 투자로까지 이어진 전통을 복원하고 발전시키는 역사적 소명을 가지고 있음을 강조하였다.

반도체법의 의미를 미국 경제안보의 대외적 틀 및 대내적 요청과 관련하여 풀어주고 있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반도체 공급망 안정 및 재편을 위한 양자 및 다자간 전략적 협력을 강조한 데 이어, 반도체 첨단 제조 지원이 소수 기업들이나 석박사급 첨단 엔지니어뿐 아니라 대졸 미만 학력의 기술자 및 건설노동자 등을 포함한 수십만 명의 평범한 미국 시민들에게 양질의 직장을 제공할 것이고 이를 위해 기업 노동조합 전문대학 등이 참여하는 교육 프로그램 활성화가 진행될 것임도 언급했다.

반도체법은 기술경쟁에서 승리, 첨단제조기술 리더십 회복, 공급망 안정 및 재편, 양자 및 다자간 경제안보협력체 구축, 경기회복, 고용증대 등 다양한 목표를 구슬로 꿰어 연결함으로써 바이든 행정부가 내세우고 있는 '중산층을 위한 외교'를 실현하는 대표적 사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물론 제시된 목표와 비전이 달성되기까지 많은 난관이 예측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과 정책이 지향하는 비전과 목표를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담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고민이 깊고 문제의 해결을 절실히 모색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정책의 목표와 장기 비전을 명확하게 잡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며 이는 성공적인 정책 실행을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경제안보와 첨단 기술혁신 강화를 위해 만들어지고 있는 정책과 법들도 단기적 위기에 대응을 넘어 구체적인 목표와 장기 비전을 담을 수 있도록 당면한 문제점 규정과 해결책 모색 과정에서 이에 관한 논의들이 보다 활발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배영자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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