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감자 '비례대표 확대' 불씨 살리려면? 개방형 명부제 대안 거론

입력
2023.05.31 04:30
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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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개특위 숙의 후 "비례대표 확대" 27%→70%
여성·청년·장애인 국회 진출로 '비례성 제고'
현실 정치선 진영 투사화·지역구 진출 모색만
정당 신뢰 제고·비례대표 인식 전환 병행돼야

2024정치개혁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 4월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계단에서 국회 전원위원회의 선거개혁 논의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정개특위가 전원위에 제출한 세 가지 방안은 비례성과 대표성 확대를 위한 선거개혁 취지에서 보면 한계가 존재하며 일부는 역행하는 부분도 있다"고 주장했다. 뉴스1

2024정치개혁공동행동 관계자들이 지난 4월 10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관 앞 계단에서 국회 전원위원회의 선거개혁 논의 촉구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참가자들은 "정개특위가 전원위에 제출한 세 가지 방안은 비례성과 대표성 확대를 위한 선거개혁 취지에서 보면 한계가 존재하며 일부는 역행하는 부분도 있다"고 주장했다. 뉴스1


"비례대표 의석수를 최소한 60석 이상 확보해야 한다. 소선거구제 위주 제도로는 대량 사표(死票)를 막을 수 없다."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


"국민 눈높이에서 바라보면 비례대표 제도는 중앙당의 공천권을 강화하고 특정 정치세력의 권력을 유지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했다."

이헌승 국민의힘 의원

내년 4월 22대 총선을 앞두고 국회가 '룰 세팅'에 착수하면서 비례대표 증원이 주요 화두로 떠올랐다. 비례대표는 민의를 대표하는 국회가 성별·나이·직업 등의 쏠림을 막고 정치·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도입됐다. 이 같은 취지에도 '공천 과정의 비민주성' '진영을 대표하는 투사 양성' 등 폐단에 대한 우려가 끊이지 않으면서 선거제 개편 논의에서 늘 '뜨거운 감자'로 꼽힌다. 그럼에도 이달 초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의 숙의형 공론조사 결과, 참여자들 사이에서 '대표성과 비례성 강화'를 명분으로 한 비례대표 증원에 대한 공감대는 조사 이전보다 크게 늘었다. 향후 비례대표 증원 불씨를 살리려면 양극화된 정치 속에서 도드라지고 있는 비례대표제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개선책을 동시에 논의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공론조사 결과. 그래픽=김대훈 기자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 공론조사 결과. 그래픽=김대훈 기자


공론조사 후 바뀐 인식... "비례 증원" 27%→70%

국회 정개특위의 선거제 개편을 위한 숙의형 공론조사에서 가장 극적인 인식 변화는 '비례대표 증원'과 관련된 것이었다. 토론회 전(5월 1, 2일) 설문조사에서 '지역구 의원 수를 줄이고, 비례대표 의원 수를 늘리는 것이 좋다'는 응답은 27%에 그쳤으나, 토론회 후(5월 13일)에는 70%로 급증했다. 반대로 '지역구 의원 수를 늘리고, 비례대표 의원 수를 줄이는 것이 좋다'는 응답은 46%에서 10%로 급락했다.

이 같은 인식 변화는 비례대표 증원이 '대표성 제고'로 이어질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비례대표 증원'에 공감한 이들 중 42%는 '여성, 청년 등 다양한 국회의원을 뽑을 수 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현행 지역구 의원 중심으로 국회를 구성한다면 중년, 남성, 법조인·관료 등 특정 집단이 과다 대표할 수 있다는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하상응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공론조사에 참여해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장애인, 청년, 여성 등 지역구에서 당선되기 어려운 사람들을 국회로 진출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비례대표 증원에 대한 지지가 늘어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3차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에 관한 결의안 심사를 위한 전원위원회에서 지역구와 비례대표 국회의원 정수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김경협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12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제3차 국회의원 선거제도 개선에 관한 결의안 심사를 위한 전원위원회에서 지역구와 비례대표 국회의원 정수에 대해 발언하고 있다. 고영권 기자

각 정당이 득표한 만큼 의석 수를 가져가는 '비례성'을 높인다는 점도 비례대표 증원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다. 소선거구제인 우리나라에선 선거구당 최다득표 후보 1명만 선출돼 사표가 대량 발생하는 만큼 전체적인 정당 지지율과 다른 의석 구성이 나오기 때문이다. 2020년 총선 당시 서울 지역에서 제1당(더불어민주당)과 2당(미래통합당)의 득표율은 11%포인트 차였는데, 실제 의석 기준으로는 민주당이 전체 49석 가운데 41석을 독차지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역구·비례대표를 혼합해서 선거를 치르는 것은 각 제도의 장단점을 보완하는 차원"이라며 "현행 제도로는 비례대표 의석 수가 너무 적어 (비례성 제고라는)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비례가 지역구 의원보다 '양 극단 표결' 경향

비례대표에 대한 여론의 불신을 해소하기 위해선 '다양한 계층·직능·세대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비례대표의 취지가 현실에서 제대로 작동했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대표성·비례성 제고 등 긍정적인 측면에도 현실 정치에서 적지 않은 부작용이 노출돼 왔기 때문이다.

이유는 복합적이다. 우선 공직선거법에 비례대표 후보자 선출 방식과 과정 등에 대한 별도의 규정이 없다. 이에 비례대표 공천과 순번 결정을 두고 당내에서조차 '깜깜이' 논란이 있어 왔고, 유권자들도 비례대표를 직접 선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신이 깊다. 더욱이 당선된 비례대표들의 의정 활동이 자신들의 전문성을 살리기보다는 공천을 준 지도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이나 재선을 위한 지역구 노리기에 몰두한다는 인식이 강하다. 기성세대에게는 민주화 이전 특정 정당의 의석 수를 늘리기 위해 비례대표제가 악용된 기억도 남아 있다.

비례대표의 실제 의정 활동은 어떨까. 한국일보가 21대 국회 법안 발의 현황을 분석한 결과, 이달 27일까지 비례대표 의원 47명의 대표발의 법안 건수는 1인당 평균 65.2개로 지역구 의원 평균(67.6개)과 비슷했다. 하지만 비례대표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이 실제 처리(원안 가결·수정 가결·수정안 반영 폐기·대안 반영 폐기)된 비율은 20.2%로 지역구 의원(25.4%)에 비해 5.2%포인트 낮았다. 이는 지역구 초선(23.5%)보다 낮은 수치다. 법안 발의 적극성은 비슷하지만, 통과 실적은 평균적으로 지역구 의원에 비해 다소 떨어졌던 셈이다.

최강욱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화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최강욱 김의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화를 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장승진 국민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회 지리를 익히는 데만 1년이 걸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데, 의원 업무에 익숙해질 만하면 다음 총선에 출마할 지역구를 찾아다녀야 하는 것이 비례대표들의 현실"이라며 "대부분 초선들로 이뤄진 비례대표 특성상 전문성을 적극적으로 발휘할 여건이 부족한 측면이 있다"고 지적했다.

정치 양극화가 두드러지면서 비례대표 의원들이 차기 총선 공천을 목표로 당 지도부나 강성 지지층 입맛에 맞는 의정 활동을 벌이는 상황도 증원 반대의 근거로 자주 거론된다. 비례대표 의원들이 정파적 이해만 대변해 각 진영의 투사로 나서고 있다는 건 비례대표 증원 찬성론자들도 인정하는 현실이다.

한규섭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올해 3월까지 21대 국회의원들의 본회의 표결을 분석한 결과, 국민의힘 비례대표의 표결 성향은 -0.072로, 국민의힘 전체(-0.172) 혹은 지역구 의원(-0.196)보다 높았다. 이 분석에서 표결 점수는 진보적일수록 낮고 보수적일수록 높아진다. 국민의힘 비례대표 의원들이 지역구 의원들에 비해 더 보수적인 표결을 했다는 뜻이다.

민주당 비례대표 의원의 표결 성향(-1.469)은 지역구 의원(-1.276)에 비해 낮아 지역구 의원들보다 진보 성향에 더욱 치우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여야 모두 재선 이상 의원들에 비해 초선에서 극단적인 표결 성향이 두드러졌는데, 비례대표 의원들이 지역구 의원보다 그 정도가 더 강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비례성·대표성 강화라는 취지로 보자면 비례대표를 늘리는 것이 맞다"면서도 "한국 정치 현실에서 비례대표가 그 취지에 맞게 의정활동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물음표가 붙는다"고 했다. 신 교수는 "비례대표가 지역구로 뛰어들기 위한 전 단계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라고 지적했다.

개방형 명부식 대안 제시 속 "정당 신뢰 높여야"

일각에선 유권자가 비례대표 투표 과정에서 정당과 지지 후보를 모두 선택할 수 있는 '개방형 명부식'으로 바꿀 것을 주장한다. 직접적인 비례대표 선출 권한을 유권자에게 부여해 신뢰도를 높이자는 취지다. 이번 공론조사에서 시민참여단 상대 설문조사에서도 정당에만 투표하는 폐쇄형 명부식 조사(26%)보다는 개방형 명부식에 대한 선호(72%)가 더 높았다.

개방형 명부식 비례대표제를 도입하면 비례대표제 취지와 다르게 여성, 장애인, 청년 등 다양성 제고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이재묵 교수는 "장단이 있기 때문에 그런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반론의 여지는 충분하다"면서도 "비례대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낮출 수 있다면 개방형 명부식을 도입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진표 국회의장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 주최 선거제도개편 공론조사 결과 공개토론회에서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스1

김진표 국회의장이 22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초당적 정치개혁 의원모임 주최 선거제도개편 공론조사 결과 공개토론회에서 참석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뉴스1

이와 함께 궁극적으로는 공천 시스템 개혁 등 각 정당의 신뢰도를 쌓고, 비례대표에 대한 인식을 개선하는 작업이 병행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하상응 교수는 "비례대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은 정당에 대한 불신에서 온다"고 했다. 장승진 교수는 "유권자들이 지지하는 정당에 표를 주고, 해당 정당이 공천한 이들이 의원이 돼 활동하는 게 비례대표"라며 "비례대표가 곧 '정당 대표'라는 식으로 인식이 변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손영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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