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AI의 협업으로 번역의 장벽을 허물다

사람과 AI의 협업으로 번역의 장벽을 허물다

입력
2023.07.17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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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기생충'에 등장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짜파구리'. 서로 다른 두 종의 라면을 함께 넣어 끓인 짜파구리를 16일 기준 한영 번역 프로그램에 입력하면 'Chapaguri'이란 결과 값이 나온다. 한국어 발음 그대로를 알파벳으로 다시 쓴 것으로 정확한 통역이지만 '제대로 된 통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한국 문화를 모르는 사람은 그 뜻을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기생충의 한영 번역을 담당했던 번역가 달시 파켓은 이를 'Chapaguri' 대신, 라면(Ramen)과 우동(Udon)을 합쳐 만든 'Ram-don'이라 풀어냈다. 영어가 제1언어인 이들도 그 맥락을 바로 이해할 수 있게끔 의역한 것으로, 적어도 Chapaguri보다는 나은 통역이란 평가를 받는다.

번역 프로그램으로 웬만한 통역은 다 할 수 있는 시대가 됐지만 짜파구리처럼 기계가 제대로 번역해내지 못하는 말은 여전히 많다. 그나마 문어체는 곧잘 번역하는 반면 구어체 번역은 부정확도가 비교적 높다. 대부분의 번역 프로그램들이 문서를 바탕으로 학습하는 탓이다.



[곧, 유니콘] 정영훈 엑스엘에이트 대표


2019년 설립된 엑스엘에이트(XL8)는 이 같은 번역의 한계를 극복하겠다고 나선 스타트업이다. 인공지능(AI)에 문서가 아닌 영상을 위주로 학습시켜 구어체 번역에 특화한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XL8의 기계 번역 프로그램 미디어캣은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업체(OTT)들의 영상 번역을 맡는 통번역·더빙 전문 업체들의 '초벌 번역'에 주로 활용된다. 프로그램으로 1차 번역을 한 뒤 사람 전문가가 검수하고 보완해 최종 통번역본을 만들어내는 식이다.

"고객사들과 계약 때문에 정확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아마 여러분이 OTT에서 보는 콘텐츠의 절반 이상엔 XL8 프로그램이 쓰였을 겁니다." 최근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정영훈(42)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그에게 XL8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맥락을 읽다

XL8의 기술이 다른 번역 기술과 다른 것

13일(현지시간) 미국 실리콘밸리 엑스엘에이트 사무실에서 만난 정영훈 대표. 실리콘밸리=이서희 특파원


XL8은 삼성전자와 구글 본사를 거친 정 대표와 애플 출신 박진형 최고기술책임자(CTO)가 함께 창업한 스타트업이다. 번역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업체들은 많지만 '구어체'에 특화한 번역 프로그램을 만드는 곳은 XL8이 사실상 유일무이하다는 게 정 대표의 말이다.

"다른 번역 서비스 업체들과 XL8의 가장 큰 다른 점은 데이터예요. 다른 회사들은 인터넷의 데이터를 긁어 모아서 훈련을 시킵니다. 여기서 두 가지 문제가 생겨요. 첫째, 온라인 문서는 누구나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내용이 틀린 게 많다는 거죠. 또 문서 번역은 잘하는데 대화의 경우 번역이 딱딱하거나 내용이 틀리거나 어색하게 돼죠." 이는 특히 영상 번역의 속도를 더디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영상에 담긴 말들은 대체로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이기 때문이다.

구어체 번역이란 틈새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XL8은 데이터 입력부터 다른 업체들과는 확실히 다른 방식을 취했다. 문서가 아니라 영상 콘텐츠를 학습시켰다. 매달 학습량은 3만6,000시간가량. 넷플릭스 전체 콘텐츠 시간을 다 합한 것보다 많다고 한다. XL8은 기계 번역 뒤 사람의 번역을 거친 최종본도 학습시킨다. 번역 프로그램 입장에선 일종의 정답지를 다시 받아봄으로써 어디가 틀렸는지 파악하고 고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구어체를 번역할 수 있다는 건 말 속의 맥락을 읽을 수 있다는 뜻과 같다. 같은 말이라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하는 것인지에 따라서 다르게 번역할 수 있어야 해서다. "예를 들어 한국말엔 존댓말이 있잖아요. 젊은 사람이 윗사람에게 말하는 장면인데 반말로 번역하면 어색하죠. 맥락을 읽고 그에 맞게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 XL8 기술의 강점입니다."



실시간 번역

XL8의 다음 도전

엑스엘에이트는 11일 미국 플로리다 소재의 속기 및 번역 업체 'AHT'를 인수했다고 발표했다. XL8 제공


XL8은 11일 미국 플로리다 소재의 속기 및 번역 업체 'AHT'를 인수했다고 깜짝 발표했다. 30여년 동안 플로리다 주정부에 속기 서비스 등을 제공해 온 업체가 설립된 지 이제 4년 된 회사의 품에 안긴 것이다. "XL8은 기술 회사예요. 회사에 전문 번역가는 한 명도 없죠. 반면 AHT엔 속기사, 번역가 등만 30여 명 소속돼 있죠. AHT의 인력은 XL8 번역 기술을 발전시키는 데 도움이 되고, AHT는 XL8의 기술을 이용할 수 있으니까 시너지가 클 것으로 봤습니다."

AHT 인수는 더 큰 목표를 위한 발판이기도 하다. 바로 '실시간 번역'이다. XL8 기술이 언어의 장벽을 진정으로 허물 수 있으려면 실시간 통번역까지 완벽하게 가능해야 한다고 정 대표는 말한다. "실시간 번역에 가장 큰 걸림돌이 인식 자체가 잘 안 된다는 거예요. 번역은 잘하는데,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히 알아듣는 게 잘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약 사람 속기사가 함께한다면 이를 극복할 수 있죠. 속기사가 받아친 문장을 갖고 번역 프로그램을 돌리면 되니까요."

이렇게 되면 지금은 한 이벤트를 10개 언어로 통번역하기 위해선 최소 열 명의 동시통역가가 필요하지만 미래에는 속기사 한 명만 있어도 된다. 통번역의 비약적 발전이 이뤄질 수 있는 셈이다. 이르면 연말부터 이처럼 속기사와 번역 프로그램이 협업하는 방식의 실시간 번역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게 XL8의 계획이다.


AI와의 공존

AI 시대를 맞는 우리가 고민해야 할 것

미디어에 특화한 엑스엘에이트의 번역 플랫폼 미디어캣 화면. XL8 제공


정 대표의 말대로 기계 번역이 발전하면 사람 번역가의 일자리는 줄어들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번역가는 AI에 의해 대체될 직업에 꼽히기도 한다.

그러나 번역 기술이 꽤나 발전한 지금도 사람의 번역이 더 정확하고 실시간 번역을 위해선 속기사와 협업이 필요한 것처럼 번역 기술이 번역가를 대체하기까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게 정 대표의 생각이다. "언젠가는 AI가 번역가를 대체할 날이 올 수도 있겠죠. 하지만 생각보다는 늦을 거예요. 사람이 그만큼 똑똑하거든요. 내 일자리를 빼앗는 건 AI가 아니라, AI를 잘 활용하는 동료가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우리가 할 일은 AI의 성장을 거부하고 걱정하는 게 아니라 AI를 어떻게 하면 더 잘 이용할 수 있을지 연구하는 것이 돼야 한다고 그는 강조했다.

실리콘밸리= 이서희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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