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반주' 선율에 작곡가의 더 깊은 속내가 담겨 있다

입력
2023.09.04 10:00
19면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피아니스트 김수연이 지난달 31일 금호아트홀에서 테너 김세일과 함께 볼프와 슈트라우스의 가곡을 연주하고 있다. 금호문화재단 제공

피아니스트 김수연이 지난달 31일 금호아트홀에서 테너 김세일과 함께 볼프와 슈트라우스의 가곡을 연주하고 있다. 금호문화재단 제공

얼마 전 금호아트홀 상주 아티스트인 피아니스트 김수연의 무대가 있었다. 한 해 극장을 대표하는 아티스트에게 1년간 5회 연주 기회가 주어지는데, 김수연은 그중 한 공연의 주제를 '노래'로 구성했다. 멘델스존의 피아노 독주곡 '무언가'를 연주하고 테너 김세일과 함께 볼프, 슈트라우스의 가곡을 연주한 것이다. 유학 떠난 첫해 볼프 가곡에 반해 언젠가 무대에서 연주하고 싶었다는 김수연은 가사 번역도 본인이 담당했다. 이날 김세일의 연주는 특별히 더 좋았다. 가곡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던 피아니스트의 역할이 전체 공연의 완성도에도 영향을 미쳤을 텐데 김수연은 가곡에서 피아노가 얼마나 아름다운 노래를 하는지 잘 보여줬다.

독주자로서 빼어난 기량을 갖고 있지만 앙상블 무대에서 더욱 눈에 띄는 피아니스트가 있다. 하마마츠 콩쿠르 우승,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 입상 후 성신여대 초빙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다. 해외 아티스트 입국이 허용되지 않았던 코로나19 팬데믹 3년 동안 성악이든 기악이든, 새 작품이나 유명 작품, 어떤 형태의 공연에서든 앙상블을 살려 내는 뛰어난 감각과 밸런스, 연주력으로 존재감을 확실하게 알렸다. 덕분에 아티스트들이 앞다퉈 찾는 피아니스트가 됐고 관객도 그가 출연하는 공연을 더 선호하게 됐다.

첼리스트 한재민이 지난달 24일 금호아트홀에서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와 함께 무대를 꾸미고 있다. 금호문화재단 제공

첼리스트 한재민이 지난달 24일 금호아트홀에서 피아니스트 일리야 라쉬코프스키와 함께 무대를 꾸미고 있다. 금호문화재단 제공

무대에 함께 서는 피아니스트에게 '반주자'라는 단어를 쓴다. 선율을 담당하는 악기가 주악기라 생각할 수 있지만 작곡가들은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가곡' 혹은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소나타'로 표현하며 두 악기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내는 데 공을 들인다. 모차르트, 슈만, 슈베르트, 리스트, 브람스, 포레, 드뷔시, 볼프 등 작곡가들이 쓴 가곡의 피아노 파트만 들어 보면 가사와 함께 주고받는 음악적 대화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피아노의 목소리' 혹은 '피아노가 노래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구분해 즐기게 된다.

슈트라우스의 가곡은 악보만 보면 단순하고 평이한 선율을 갖고 있는 것 같지만 '시어'만큼이나 담백하게 흐르는 노래 옆에서 슬그머니 바뀌는 피아노의 조성, 화성이 만들어 내는 판타지의 세계는 때론 경이롭다. 관현악곡과 오페라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슈트라우스는 가곡 대부분을 오케스트라 편성으로 만들었고 피아노 편곡도 썼다. 신기한 것은 곡에 따라 2장, 길어야 6장짜리에 불과한 피아노 악보지만, 오케스트라 편성에 비해 어딘가가 비어 있거나 부족하다는 느낌이 없다. 적은 개수의 건반으로도 긴 호흡과 넓은 우주를 표현해내는데 노래가 끝난 후에도 이어지는 슈트라우스만의 기품과 긴 여운은 피아니스트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

20여 년 전 지휘자 정명훈이 메조 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의 내한 무대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적이 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화려한 테크닉과 변칙적인 흐름 가운데에서도 안정적인 노래로 감동을 만들어내는 바르톨리도 훌륭했지만 그의 호흡이나 작은 움직임, 해석까지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던 정명훈의 피아노는 어느 순간부터 바르톨리의 존재를 잊게 만들 정도로 놀라웠다. '지휘자 정명훈'에게 좋은 피아니스트를 뺏긴 것 같은 느낌은 여전히 있지만 그날의 무대는 함께 선 피아니스트가 얼마나 중요한지 확실히 각인시켜 주는 사건이 되었다.

올해로 75세가 된 바이올린의 여제 정경화는 지난봄 일본 벳부에서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생애 처음으로 듀오 무대를 가졌다. 어릴 때부터 20세기 대가들의 가르침을 받았던 두 사람은 그리웠던 시절의 음악적 표현과 자유로움을 교감하며 함께 연주하는 시간을 여한 없이 즐겼다.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지난봄 일본 벳부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마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와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지난봄 일본 벳부에서 듀오 리사이틀을 마친 후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크레디아 제공

"연주자는 아무리 연습해도 육체적으로 가능하지 않은 순간을 마주합니다. 나이 든 연주자는 어떻게 연주하는지 알아요? 프레이징에서 예술을 표현하죠. 마르타도, 나도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음악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정확하게 연주하려고 만난 게 아니었어요. 거대한 프레이징 안에서 유영하고 교감하면서 이전에는 맛보지 못했던 환희를 봤어요." 정경화는 다시 태어나도 바이올린을 선택하겠다고 했다. 단, 좋은 피아니스트가 있다는 가정하에서다.

관객은 무대 앞쪽에 있는 연주자를 먼저 보게 되지만 무대 위에는 또 다른 연주자, 피아니스트가 있다. 작곡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쩌면 피아노 악보에 더 많이 써놨을 수 있다. 연주자들끼리 음정이나 박자가 서로 잘 맞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연주자들이 작품 속에서 만나는 상대방을 얼마나 이해하고 얼마나 교감하느냐일 것이다. 음악적 완성도는 물론 관객이 음악에 감동을 느끼는 지점이 바로 그 부분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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