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락사법 논의의 위험성

입력
2023.10.24 20:00
25면

편집자주

국민 10명 중 8명이 병원에서 사망하는 현실. 그러나 연명의료기술의 발달은 죽음 앞 인간의 존엄성을 무너뜨린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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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만 해도 한국인의 80% 이상이 자택에서 임종했다. 당시에는 '병을 앓아 집에 누워 있다가 곡기를 끊고 돌아가셨다' 혹은 '잠을 자는 중에 세상을 떠나셨다'라고 임종 과정을 말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병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는 사람이 대부분인 오늘날, 일단 병원에 입원하면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죽음은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스스로 식사를 못 하게 되면 코로 관을 넣거나, 수액 주사로 영양공급을 하고, 24시간 혈압을 점검하여 혈압이 떨어지면 혈압 상승제를 투여한다. 심장이 멎으면 심폐소생술을 하고, 자발적 호흡을 못 하면 인공호흡기를 적용한다.

현대 의학의 발달로 응급환자를 위한 연명의료장치가 질병과 노화로 인한 자연사를 막는 부작용으로 심화하는 상황에서 존엄사 논의가 시작되었다. 미국의 경우 낸시 크루잔 사건과 테리 시아보 사건을 통해 연명의료중단을 통한 존엄사 문제가 본격적으로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1983년 25세인 여성 낸시 크루잔은 자동차 사고로 심각한 뇌 손상을 입고 지속적 식물상태가 되었다. 이후, 5년간 영양공급관을 통해 생명을 유지하였으나, 환자가 회복할 희망이 없다고 판단한 부모는 관을 통한 영양공급을 중단해줄 것을 병원에 요청했고 거절당하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사건은 1989년 미국 사회에서 큰 논쟁을 일으켰고 법정 공방을 거쳐 결국 1990년 영양공급 중단이 허용되었다.

테리 시아보는 27세가 된 1990년, 심장발작으로 인한 뇌 손상으로 혼수상태에 빠진 후 회복이 되지 않았다. 1998년 남편이 테리의 영양공급관을 제거해달라고 소송을 제기했다. 남편은 '아내가 평소 인공장치에 의해 연명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라는 주장을 내세웠는데, 테리의 친정 부모가 반대하면서 미국의 여론이 남편과 부모 편으로 나뉘었다. 이 사건 역시 우여곡절을 거쳐 2005년이 되어서야 테리의 영양공급관을 제거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두 환자의 공통점은 장기간 의식 회복이 없는 식물상태라는 점이었다. 무의식 상태에서도 자발적 호흡과 같은 뇌의 기본 기능만 남아 있는 상태를 식물인간이라고 한다. 드물게 회복되는 사례가 언론에 소개되기도 하는데, 이런 불확실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12개월 이상 식물상태로 있는 환자에 대해 '지속적 식물상태'로 정의하고 있다.

이런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는 지속적 식물상태에서도 환자의 본인 의사를 존중하여 연명의료결정이 가능해졌으나, 우리나라는 아직도 식물상태에서는 연명의료결정을 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2018년부터 시행 중인 연명의료결정법은 말기 환자가 급속도로 증상이 악화하여 사망이 임박한 임종 과정에서만 적용이 가능하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상태로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있는 지속적 식물상태 환자들은 연명의료결정법의 적용을 받지 못한 채 장기간 고통을 받다 사망한다. 이들의 기저질환은 뇌졸중, 중증 치매 등이며 매년 10만여 명의 노인이 이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해둔 국민이 200만 명을 넘었으나, 말기 암 이외의 질환에서는 본인의 뜻이 존중받기 어렵다. 이런 현실에 대해 환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들도 큰 불만을 품고 있는데, 이런 답답함이 한국 국민 80%가 안락사를 찬성한다는 여론조사에 반영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속적 식물상태 환자도 원하지 않는 연명의료를 받지 않을 수 있게 연명의료결정법을 보완하는 것이지, 어려움에 처한 환자가 스스로 삶을 중단하는 선택을 하도록 유도하는 안락사법 제정이 아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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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대석서울대병원 내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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