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글세와 월세

입력
2024.01.11 04:30
27면

편집자주

욕설과 외계어가 날뛰는 세상. 두런두런 이야기하듯 곱고 바른 우리말을 알리려 합니다. 우리말 이야기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는 행복한 시간이 되길 바랍니다.

박영한의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은 다락방이다. 실제 작가는 다락방에서 글을 썼다. ‘방 한 칸’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몹시 슬프고 고통스럽다. 사진은 잘 꾸며진 다락방 모습.

박영한의 소설 ‘지상의 방 한 칸’은 다락방이다. 실제 작가는 다락방에서 글을 썼다. ‘방 한 칸’을 찾아 헤매는 과정이 몹시 슬프고 고통스럽다. 사진은 잘 꾸며진 다락방 모습.


"준비하시고~ 쏘세요!“

농구대회나 국궁대회에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가수 싸이의 공연장에서 흥을 돋우는 소리는 더더욱 아니다. 한때 익숙한 이 소리에 아버지들이 울고 웃었다. ‘일주일의 꿈’ 주택복권 이야기다. 집 없는 서민들은 일요일 낮이면 텔레비전 앞에 앉아 손에 쥔 복권 속 번호가 과녁에 꽂히길 바랐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당긴 화살이 다른 숫자를 맞히면 실망한 표정으로 한마디씩 했다. “쳇, 오늘부터 너 나오는 연속극 보나 봐라!”

1969년 생겨난 주택복권은 2006년 봄까지 이어졌다. 그야말로 우리나라 복권사의 전설이다. 1970년대 중반엔 경상도에서 사글세를 살던 20대 주부가 복권 생방송 중 응급실에 실려 간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복권 번호가 3개 연속 일치하자 흥분한 나머지 기절했다는 내용이다. 집에 대한 꿈이 얼마나 컸는지를 잘 보여준다.

“…한 번 갔던 데를 세 번 네 번 반복해서 뒤졌고, 복덕방 사람들은 우리만 보면 ‘아, 또 왔군’ 하는 표정이었다.” 박영한 단편소설 ‘지상의 방 한 칸’ 속 문장이다. 김사인도 셋방살이의 설움을 같은 제목의 시 ‘지상의 방 한 칸’에 쏟아냈다. “…초라한 몸 가릴 방 한 칸이/망망천지에 없단 말이냐/웅크리고 잠든 아내의 등에 얼굴을 대본다/밖에는 바람소리 사정없고/며칠 후면 남이 누울 방바닥/잠이 오지 않는다.”

1980년대 ‘지상의 방 한 칸’은 서민들에겐 그야말로 꿈이었다. 아이가 셋이 넘으면 골목 어귀 담배 가게에 아이들을 맡겨 두고 방 얻으러 가는 부모들도 있었다. 힘들게 대문 옆에 있는 방이나마 얻어 들어가 살아도 주인집 눈치 보느라 부모의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그래서일까 사글세라는 말에선 서글픔이 느껴진다.

사글세는 한자 ‘삭월세’(朔月貰)에서 생겨났다. 삭은 매달 첫째 날로, 사글세는 초하룻날 월세를 낸다는 의미일 게다. 표준국어대사전엔 사글세만 올랐다. 언중의 입에 자주 오르는 사글세에 밀려 삭월세는 버려졌다. 집이나 방을 다달이 빌려 쓰는 사글세는 월세와 같은 말이다.

올해 들어 전셋값이 또 크게 올랐다. 일찌감치 전세를 포기하고 월세에서 생활하는 2030대 젊은이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다. 상황을 꿰뚫고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그들에게 우울한 말인 사글세는 어울리지 않는다. 어휘적으로도 사글세는 월세에 크게 밀렸다. 가슴 아픈 단어 사글세가 옛말이 되어 가고 있다.




노경아 교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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