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의 교과서' 지메르만이 눈뜨게 한 '시마노프스키'라는 세계

입력
2024.01.15 11:00
20면

편집자주

20여 년간 공연 기획과 음악에 대한 글쓰기를 해 온 이지영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이 클래식 음악 무대 옆에서의 경험과 무대 밑에서 느꼈던 감정을 독자 여러분에게 친구처럼 편안하게 전합니다.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Bartek Barczyk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Bartek Barczyk

무대 위 연주자가 제일 고마울 때는 연주를 듣고 음악이(작품이) 좋아졌을 때다. 그 음악을 듣는 동안 감동과 쉼과 위로, 신선한 충격 등 좋은 에너지를 갖게 됐을 때 그 순간을 선물한 연주자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된다. 그런데 그 감정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최고 연주자의 무대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익숙하고 위대한 명곡이어야만 하는 것도 아니다. 물론 지난주 특별한 연주를 들려준 인물은 시대를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었다. 하지만 그가 만든 감동의 순간은 쇼팽도, 드뷔시도 아닌, '시마노프스키' 작품에서였다.

쇼팽의 조국 폴란드 태생의 피아니스트인 지메르만은 1975년 제9회 바르샤바 쇼팽 국제 콩쿠르 우승자로 최고의 위치를 지켜 온 인물이다. 피아니스트들에게 쇼팽은 어느 지점에서든 반드시 마주해야 할, 피할 수 없는 산이다. 물론 쇼팽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연주자, 감상자도 있다. 쇼팽이 아닌 다른 작곡가의 작품에서 훌륭한 음악을 들려주는 연주자들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쇼팽 음악에서 정답을 찾는 일은 어리석은 것이지만, 여전히 높은 권위를 자랑하는 쇼팽 콩쿠르는 지메르만을 설명하는 중요한 이력 중 하나다.

시마노프스키 각인시킨 지메르만 내한 리사이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Bartek Barczyk

크리스티안 지메르만. ⓒBartek Barczyk

그런데 지메르만의 활동을 잘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오랜 시간 시마노프스키 작품을 알리는 데 애써 왔는지 알 수 있다. 쇼팽 음악의 적자로 자신에게 열광하는 팬들 앞에서 틈만 나면 시마노프스키를 연주하고 이야기를 꺼냈지만 존재감이 약했다. 하지만 지난 3, 5, 10일 서울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내한 리사이틀에서 청중은 시마노프스키 음악에 매료된 듯했다. 2003년 첫 내한 리사이틀을 가진 지 20년 만이다.

카롤 시마노프스키는 쇼팽, 스크랴빈, 드뷔시, 스트라빈스키의 영향을 받았다. 스크랴빈은 음악은 물론 외모까지 닮고 싶었던 쇼팽의 추종자였지만 말년에는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다. 시마노프스키 역시 쇼팽 음악에서 출발해 다양한 여정을 거쳤다. 그는 프랑스 인상주의 기법을 도입한 음악에 이어 폴란드 민족성을 드러내면서 그만의 차별화된 음악을 남겼다. 이것을 감안했을 때 지메르만의 리사이틀은 흥미로울 수밖에 없었다.

카롤 시마노프스키. 위키미디어 커먼스

카롤 시마노프스키.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번 내한 연주 프로그램은 쇼팽의 네 개의 녹턴과 소나타 2번, 드뷔시의 '판화', 그리고 시마노프스키의 '폴란드 민요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었다. 시마노프스키 음악이 어디에서 시작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갔는지, 무엇으로 그만의 확연한 목소리를 갖게 됐는지 한눈에 펼쳐 보여준 구성이었다. 지메르만은 쇼팽 음악의 익숙함과 드뷔시의 몽환적이고 시각적으로 펼쳐진 환상에 이어 시마노프스키의 10개의 변주곡으로 풍성한 이야기를 쏟아냈다. 중간중간 스크랴빈이 떠올랐지만 독창적이었고, 변주곡 8번 ‘장송행진곡’은 앞서 연주한 쇼팽 소나타 2번 ‘장송행진곡’에 이어 다시 한번 묵직하게 재해석됐다. 지메르만이 왜 두 작품을 같은 선상에 두고 연주했는지 강렬하게 인식하게 만든 셈이다.

변주곡 10번 피날레는 쇼팽보다는 리스트를 연상시키는 뜨겁고 거대한 서사가 보였다. 심지어 정직하면서도 분명한 어조로 노래하는 바흐의 푸가가 들리는 듯했다. 누군가와 닮은 듯하지만 조금씩 전혀 다른 작품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메르만이 작정하고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는 동안 시마노프스키라는 거대한 산맥을 함께 올랐고 정상을 맛본 기분이 들었다.

'카롤 시마노프스키 피아노 작품집'으로 그라모폰상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카롤 시마노프스키 피아노 작품집 음반 표지.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카롤 시마노프스키 피아노 작품집 음반 표지.

이 기분 좋은 일탈의 경험은 지메르만이 최근 발매한 '카롤 시마노프스키 피아노 작품집'(도이치 그라모폰) 앨범으로 이어진다. 이 앨범은 '2023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드'에서 피아노 부문상을 받았다. 오늘날 애호가들에게 그라모폰상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질지 모르겠다. 음악이 개인 감상에 미치는 영향은 수상 이력과 무관하게 다가올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끔 주목해도 좋겠다 싶은 수상 목록들이 있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사랑받는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등을 연주한 앨범이 아닌, 세상에 덜 알려진 작품이 좋은 연주자에 의해 새롭게 부각된 앨범이 상을 받은 경우다.

이제 시마노프스키 음악을 얘기할 때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의 이름은 반드시 함께 언급하게 될 것 같다. 어쩌면 폴란드 태생의 쇼팽 콩쿠르 우승자라는 옛 수식어보다도, 그의 멘토였던 루빈스타인과 함께 시마노프스키 음악을 세상에 알린 인물로 더 깊게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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