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필리핀 남중국해 밀약”… 미·일·필 정상회담 직전 충격적 폭로

입력
2024.04.11 16:40
수정
2024.04.11 18:20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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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중' 두테르테 전 대통령 대변인 폭로
구체적 논의 일자나 증거는 제출 안 해
마르코스 "전 정부에 들은 바 없어, 당혹"

로드리고 두테르테(왼쪽) 전 필리핀 대통령이 2019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베이징=신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로드리고 두테르테(왼쪽) 전 필리핀 대통령이 2019년 8월 중국 베이징에서 시진핑 국가주석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베이징=신화 연합뉴스 자료사진

미국·일본·필리핀 3국 정상회의를 코앞에 둔 시점에 필리핀에서 전임 대통령이 중국과 ‘남중국해 신사 협정’을 맺었다는 충격적 의혹이 터져 나왔다. 친중 행보를 보였던 로드리고 두테르테 전 필리핀 대통령이 재임 시절 남중국해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밀약을 맺었다는 것이다. 한때 국가 수장이었던 이가 영토 문제에서 중국에 ‘한 수’ 접어 줬다는 의혹에 필리핀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시에라 마드레에 시설 보수 않기로 구두합의”

11일 필리핀 국영 PNA통신 등에 따르면, 두테르테 전 대통령 대변인이던 해리 로케는 최근 “전 정부가 남중국해 문제를 두고 중국과 비밀 협약을 맺었다”고 폭로했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 남중국해 스플래틀리(중국명 난사·필리핀명 칼라얀) 군도 세컨드토머스 암초에 위치한 폐군함 ‘시에라 마드레’에 필수 물자만 보내고 시설 보수나 건설은 하지 않기로 구두 합의했다는 게 로케의 주장이다.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시에라 마드레는 필리핀 영해 주권의 상징이다. 필리핀은 중국이 1995년부터 스플래틀리 군도에 군사 시설을 짓자 이에 맞서기 위해 1999년 인근 지역 모래톱에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건조된 낡은 군함 시에라 마드레를 일부러 좌초시켰다. 이후 시멘트 등을 이용해 배를 고착한 뒤 병력을 상주시키고 있다.

남중국해 스플래틀리 군도 세컨드토머스에 좌초된 필리핀 폐군함 시에라 마드레. 10여 명의 필리핀 병사가 주둔 중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남중국해 스플래틀리 군도 세컨드토머스에 좌초된 필리핀 폐군함 시에라 마드레. 10여 명의 필리핀 병사가 주둔 중이다. 로이터 연합뉴스 자료사진

배가 낡고 잔뜩 녹이 슨 탓에 필리핀 정부는 그간 물품 보급선에 식량, 물 등 보급품뿐 아니라 선박 수리 자재도 보냈다. 로케의 말이 사실이라면 두테르테 정부가 배 보수를 포기하는 방식으로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서 한발 물러서며 중국에 유화 제스처를 취한 셈이다.

실제로 중국은 2022년 6월 취임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시에라 마드레에 보급선을 보낼 때마다 필리핀이 암초에 눌러앉은 군함을 옮기겠다는 약속을 이행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해 왔다. 세부 내용은 조금 다르지만 전임 행정부 ‘입’이었던 측근을 통해 양국 사이에 모종의 약속이 있었다는 점이 드러난 것이다.

마르코스 ‘필리핀 주권 타협에 경악”

필리핀 정부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마르코스 대통령은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에서 열리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와의 회담에 참석하기 위해 10일 미국으로 출발하기 전 기자들과 만나, “전 정부로부터 어떤 설명도 듣지 못했다”고 밝혔다. 그는 “비밀 협정으로 필리핀 영토와 주권을 타협했다는 생각에 경악했다”며, “우리 영토 내에서 무엇을 하기 위해 타국 허가를 받아야 한다면, 그 합의는 지키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필리핀 정부는 두테르테 정부 관계자들에게 상황을 파악하고, 황시롄 주필리핀 중국 대사를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한다는 방침이다.


지난달 5일 남중국해 스플래틀리군도 세컨드토머스 암초 인근에서 보급품을 전달하려는 필리핀 선박(앞쪽)과 이를 저지하려는 중국 해경선이 대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지난달 5일 남중국해 스플래틀리군도 세컨드토머스 암초 인근에서 보급품을 전달하려는 필리핀 선박(앞쪽)과 이를 저지하려는 중국 해경선이 대치하고 있다. AP 연합뉴스

정치권도 뜨겁게 달아올랐다. 필리핀 하원은 “주권 문제는 비밀 협정 대상이 될 수 없다”며 의회 차원의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상원에서도 청문회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랐다.

그러나 두테르테 전 대통령은 의혹을 강하게 부인했다. 그의 법률고문인 살바도르 파넬로 변호사는 “대통령은 자신이 어떤 신사 협정도 체결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당시 국방장관과 내무장관 등 전 내각 관료들도 “국익에 반하는 어떤 합의도 없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파장은 당분간 이어질 전망이다. 두테르테 전 대통령이 임기 중 중국의 영유권 강화 움직임에 적극 대응하지 않아 ‘심증’은 있지만, 공식 문서나 기록 등으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쉽지 않은 탓이다.

하노이= 허경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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