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레랑스가 필요한 시대

입력
2024.04.21 12:30
26면
구독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2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의 빈소에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뉴스1

20일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의 빈소에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뉴스1

지난 18일 홍세화 장발장은행장의 궂긴 소식이 들려왔다. 1979년 남민전(남조선민족해방전선) 사건에 연루돼 고국에 돌아올 수 없었던 그가 알려진 계기는 1995년에 출간한 자전적 에세이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였다. 망명자이자 이주노동자로서 체험한 프랑스 사회를 '똘레랑스'(관용)라는 가치로 집약해 한국에 소개한 것이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도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 인색했던 우리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 2007년 그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똘레랑스를 소개한 지 12년이 지난 당시에도 관용이 뿌리 내리지 못한 현실을 아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선 색깔론과 지역주의가 여전히 작동했고, 극심한 경쟁에 따른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경시하는 세태를 지적했다. 그는 이후 정당인, 언론인, 사회운동가로서 똘레랑스라는 해법을 제시하는 삶을 올곧게 실천했다. 벌금형을 받고도 돈을 낼 형편이 못 돼 옥살이하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장발장은행을 설립해 최근까지 소외된 이들을 살폈다.

□ 4·10 총선은 17년 전 그가 우려한 한국 사회의 징후들이 아직도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준다. 종북 프레임은 선거 캠페인에 여지 없이 등장했고, 정치인들은 경쟁자들을 악마화하는 데 몰두했다. 그러면서 대화와 타협을 말하는 이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졌다. '호남은 파란색(더불어민주당), 영남은 빨간색(국민의힘)'으로 상징되는 지역주의 구도는 4년 전 총선보다 강화됐다. 20년 만에 원내 진입에 실패한 녹색정의당은 독자적인 진보정당으로서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다.

□ 우리에게도 똘레랑스와 비슷한 화이부동(和而不同), 역지사지(易地思之)와 같은 전통이 있다. 이처럼 차이를 인정하면서 공존하려는 노력은 정치·경제·사회 양극화 해소의 첫걸음이다. 저출생·고령화로 인한 인력 부족에 시달리는 한국은 해외 노동력 유입 등에 따른 다문화 사회를 준비해야 하는 입장이다. 어쩌면 똘레랑스는 우리 사회에 소개됐던 1995년보다 2024년 현재 더 유효한 가치일지 모른다.

김회경 논설위원

댓글 0

0 / 250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 저장이 취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