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키워 놨더니 엄마 무시하는 자식들… 외롭고 쓸쓸해요

입력
2024.04.22 04:30
수정
2024.04.22 09:02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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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열의 회복]

편집자주

‘정우열의 회복’은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정우열 원장이 <한국일보>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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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남편과 20년 이상 별거하고 있는 60대 여성입니다. 가부장적인 남편과는 성격이 맞지 않아 결혼 직후부터 많이 다퉜고, 아이들 앞에서도 잘 지내기보다는 싸우는 모습을 더 많이 보여줬습니다. 싸움이 과격해지면 남편은 폭력을 쓰곤 했고, 이를 견디다 못해 제가 집을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때마다 엄마 없이 자랄 아직 어린 쌍둥이 아이들이 마음에 걸려 돌아왔습니다. 두어 번 그런 일이 반복되고,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무렵에 또다시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을 피해 집을 나온 저는 그대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때는 아이들도 차라리 엄마와 아빠는 따로 사는 게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자존심이 강해 주변에 신세 지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라 그때부터 식당이나 마트, 텔레마케터 등 할 수 있는 온갖 일을 하며 돈을 벌었습니다. 집을 나온 이후 남편은 아이들을 돌보지 않아 멀리 있으면서도 제가 아이들 학비나 생활비를 신경 써야 했습니다. 쌍둥이 중 큰 아이는 대학에 진학한 이후에는 같이 지내며 뒷바라지했습니다. 둘째는 재수하고 다른 지역으로 대학을 가면서 떨어져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가정을 주지 못해 아이들 모두에게 늘 미안했지만, 이런 이유로 둘째에게는 더 미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지금은 아이들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독립해서 자기 밥벌이를 하지만, 엄마로서 든든하게 떠받쳐 주는 역할을 해 주지 못했다는 생각은 여전합니다.

제 나름대로는 아이들을 뒷바라지하려고 애썼고, 완벽하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습니다. 평소에 아이들과도 잘 지내는 편이었는데, 독립하면서 오히려 다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아이들에게 "나를 무시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언제 자기들이 엄마를 무시했냐며 더 크게 화를 냅니다.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를 했는데, 이제 모아놓은 돈도 없고 늙은 저에게 아이들이 함부로 대한다는 생각에 화도 납니다. 이럴 때마다 나는 아이들에게 할 만큼 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는지, 하는 배신감도 들지만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해 이러는 것 같다는 죄책감도 듭니다.

아이들이 취직하면서는 이전보다 일하는 시간을 줄이긴 했지만, 그래도 자식들에게 다 늙어서 손 벌릴 수 없다는 생각에 여전히 돈을 벌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일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불안하기도 합니다. 20년 이상 몸으로 하는 일을 줄곧 해 와서인지 벌써 여기저기 아픈 곳도 많습니다. 쓸쓸한 기분이 들 때도 많습니다. 어릴 적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저와 형제들을 키워 온 어머니도 최근 세상을 떠났고, 이 나이 먹도록 집도 무엇 하나도 제대로 이뤄 내지 못한 제 모습이 초라하게만 느껴집니다. 결혼해서 가정을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고생하는 딸의 모습만 생전에 보여드린 어머니에게도 제가 한처럼 남아있을 것만 같습니다.

요새는 하루하루가 슬프고 우울합니다. 삶에 어떤 낙도 없는 것 같습니다. 자식들이나 주변에 신세 지지 않고 건강히 살다가 적당한 시기에 조용히 죽고 싶은데, 이런 소망도 제게는 어려운 걸까요.

유경은(가명·61·직장인)

경은씨의 사연을 읽으면서 남편과 오랜 시간 별거하며 홀로 생계를 꾸리신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애를 쓰며 살아오셨는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책임을 다하는 삶은 때론 괴롭고 또 벅찼을 텐데도 엄마로서, 누군가의 딸로서, 또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서의 역할을 책임감 있게 해내셨고 지금도 하고 계십니다. 그런 경은씨에게 그간 참 고생하셨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이제는 자식들이 독립하면서 홀로 감당하셔야 했던 부모로서의 무거운 짐을 조금 내려놓으려는 시점에 오히려 부모와 자식 관계에서 갈등이 생겨 고민하시는 듯 보입니다. 특히 요새 ‘자식들이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고 하셨습니다. 경은씨와 비슷한 고민을 비슷한 나이에 가지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이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왜 이런 기분을 느끼는지부터 자세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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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타인이 나를 무시한다는 감정은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을 때 강해지곤 합니다. 경은씨는 자신을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고 표현하셨는데, 자존심도 마찬가지로 본인에 대한 존중이 없을 때 더 크게 작용하곤 합니다. 주변이나 자식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다는 경은씨의 마음은 만약 그렇게 했을 경우에 상대방이 당신을 무시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서 나왔을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찾아온 어머니의 사망은 일종의 기폭제가 됐을 겁니다. 특히 경은씨는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로 당신과 형제자매를 키운 어머니에게 충분히 의지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경우 겉으로 보기에는 독립적인 삶을 추구하면서도, 사실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기대고 싶은 소망을 억압한 상태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평소에 감춰 둔 소망이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쓸쓸하고 우울한 감정으로 터져 나온 것입니다. 부모의 죽음으로 인한 상실감과 슬픔은 자식에 대한 감정과 맞닿기도 합니다. "자식들은 왜 기대만큼 나를 환영하고 존중하지 않나"라는 실망으로 이어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자식들은 본인을 무시하는 것 같고 또 한편으로는 주변에 신세 지기 싫다는 생각도 여전해서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딜레마가 지금 경은씨의 내면에 있는 가장 큰 핵심 갈등일지 모릅니다.

경은씨는 유독 지난 일들을 돌아보며 생긴 죄책감에 대해 많이 이야기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안정적으로 키우지 못해 미안하고, 어머니에게도 자신의 존재가 한으로 남았을까 걱정하고 계시죠. 인생을 이렇게 돌아보게 되는 일 자체가 노년기에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심리적 현상입니다. 당신이 무언가를 잘못해서 자꾸 과거를 돌아보고 후회를 갖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이 이 시기에 의식적으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회상이라는 과정을 심리적으로 경험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이 예전에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돌아보고, 또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야 될지를 준비하는 정체성의 '통합'을 위해 일어나는 심리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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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갖고 계신 건강에 대한 걱정도 나이가 들면서 변화하는 몸을 보며 신체상 및 '자기감(sense of self)'의 변화에 대한 애도의 차원에서 자연스러운 감정입니다. 이를 너무 이상하게 여기거나 두려워하기보다는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어머니의 사망도 노년기에 찾아올 죽음의 불가피함을 인식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은 혼란스럽고 괴로울 수 있지만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언젠가 찾아올 죽음의 단계를 준비하는 경로인 셈입니다. 거시적 관점에서 보며 자신의 마음이 자정 작용을 하고 있다고 여기면서 '내 마음이 나한테 뭐라고 말하고 있나'를 잘 따라가보는 것이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삶에서 가장 중요한 건 경은씨 본인이라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변이나 자식들에게 신세 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다가 죽고 싶다는 당신의 소망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남이 아니라 '나'를 중심에 두고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완벽하지 않았고 실수도 했고, 부족한 부분도 있었지만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고 스스로에게 이해심 있는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자녀 양육이나 일에 대한 성취 및 긍정적인 면을 기록해 보는 것은 큰 도움이 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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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나 자식을 위한 일보다는 경은씨의 취미 활동을, 마땅한 취미가 없다면 자원봉사에 참여하는 등 자기주도적인 삶을 통해 의미를 다시 발견해 가기를 권합니다. 또 가족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맞는 지인들과의 관계를 통해 존재감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노년기에는 이처럼 자신에게 집중하면서 생기는 자신감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렇게 자신감을 쌓아가다 보면 자식들이 무시하는 것 같다는 경은씨의 고민에서도 자연스럽게 벗어나게 됩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을 먼저 존중하는 일입니다. 그래야 자식들이나 주변에서도 당신을 존중하는 선순환이 이뤄집니다. 그간 열심히 자신의 삶을 꾸려온 경은씨의 노년이 모두에게서 귀하게 여겨지기를 바랍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상담을 신청해 보세요. 상담신청서는 한국일보 신청 링크(https://forms.office.com/r/Krc2wt0UH5)에서 작성해 주시면 됩니다. 또 기사 하단의 QR코드로도 접속이 가능합니다. 선정되신 분의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과 홈페이지에 소개되며 익명을 철저히 보장합니다. ▶상담신청서 바로가기


전혼잎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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